작년 11월 초반의 일이었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한 엄마가 할 말이 있다며 나를 불러 세웠다. 평소, 엄마들과의 교류가 그리 많지 않은 내 입장에서 그런 일은 잘 없는 편이라, 뭔가 불편한 직감을 안고 그 엄마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우리 아이의 말에 따르면, 당신의 아이가 ‘나는 터닝메카드 100개 있는데, 너는 하나도 없지? 가난뱅이야!’ 이런 식으로 말을 한다면서, 다섯 살 때는 안 그러더니 여섯 살이 되니 이응이가 왜 그렇게 거칠게 행동하는지 모르겠단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확인되지 않은 아이들로부터의 카더라 통신에 기반한 근거 없는 말들로 이어졌는데, 나중에 선생님께 확인한 결과, 대부분이 근거 없는 것들로 밝혀졌다.)

사실, 여기까지는 아이들 사이에서 그런 일들은 충분히 있을 수도 있고, 내 아이에게 잘못이 있다면 사과하고 바로 잡아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진지한 자세로 경청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다음 이야기부터 시작되었다. 여기부터가 그 엄마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인 듯 했는데, 자기 아이가 말하기를, 어느 날, 이응이가 아이들과 함께 놀다가, 미끄럼틀 앞에서 조금 느리거나 좀 어눌하게 행동하는 아이한테 ‘야, 너 그러니까 장애인 같아.’라는 언어폭력까지 행사했다는 것이었다. 이 때까지 나는 그 엄마의 말을 조용히 들으며 이성적으로 정중히 처신할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이쯤 되니 아무리 이성적인 나라도 이건 아니다 싶어 일단 그 엄마에게 눈으로 레이저부터 쏘았다. 그리고는 조용하지만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장애인 같다는 말은 언어폭력이 되고, 장애인은 부정적이고 나쁜사람이 되는걸까? ⓒfreepick

‘지금 언어폭력이라고 하셨나요?’

내 반응에 그 엄마도 아차 너무 멀리 갔다 싶었는지, ‘어머! 제가 너무 갔네요. 죄송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제 나는, 내 레이저광선을 거둬 드리고는 조근조근 최대한 이성적이려고 노력하며 (우리 엄마들이란 족속들이 아이 일 앞에서는 파충류의 뇌로 돌아가 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내 입장을 이야기 했다.

‘우선, 저희 아이 때문에 다른 아이가 마음이 불편하고 속상했다니 죄송합니다. 지금 어머님이 말씀 하신 일들에 대해 제가 선생님들께 전달 받은 부분이 전혀 없어 몰랐습니다. 선생님을 통해, 요즘 저희 아이 유치원 생활이 어떤지 전후 상황을 알아보고, 아이가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잘 지도하고 바로잡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어머님께서 말씀 하신 부분이 모두 아이를 통해 들으신 것들인데, 저희 아이도 유치원에 다녀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지만, 저는 저희 아이의 말도, 다른 아이가 했다는 말도 50% 정도만 믿으려 하거든요.’

이게 내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매너와 이성적 행동이었다. 내가 그 다음에 그 엄마에게 하지 못한(?), 아니 하지 않은 말을 이 지면에 적어 보기로 한다.

<지금 당신이 장애인인 나에게 장애인 같다는 말이 언어폭력이라고 했나요? 누군가가 장애인 같다는 말을 듣는다면, 그건 욕이 되고 폭력이 되는 건가요? 그럼 나 같은 특성을 지닌 사람은 그 존재 자체가 부정적이고 나쁜 사람이 되는 건가요? 우리 아이는 장애인이라는 말이 일상어로 사용되는 가정에 살고 있고, ‘시각장애인 이동지원센터’라고 쓰여진 택시를 타며, 엄마는 시각장애인이라는 말을 최소 3년 이상 듣고 살았는데… 과연, 장애인이라는 말이 아무렇지도 않은 환경에서 자란 이 아이의 말이, 여섯 살 아이의 의도가, 당신 같이 그 언어의 가치중립성을 훼손해 버린 어른의 의도와 마음과 같을까요? …>

미안하지만, 장애인인 내게 다가와 장애인 같다는 말이 언어폭력이라고 말하는 수준의 사고 체계를 가진 그녀가 이런 맥락을 알아들을리 만무하다는 회의적인 생각에, 그녀와 더 긴 말을 하지는 않았었다. 그리고, 그 순간, 생각했다. 언젠가 내가 마음 속의 부정적 감정과 화를 내려 놓고 좀 더 이성적으로 이 사건을 객관화할 수 있을 때가 되면, 이 문제에 대한 칼럼을 쓰겠노라고…

'야, 너 장애인 같아.' 라는 말은 언어폭력적인 말일까. ⓒfreepick

그 후로 6개월이 흘렀다.

그 간,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매우 많은 고민을 했고, 시각장애부모들의 육아모임인 심봉사임당 멤버들과도 맥주 식스팩 패키지를 앞에 두고 진지한 이야기를 나눠 보았다.

우선, 내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듣기에 불편하고 좋지 않은 불쾌한 말을 한 것은 분명한 잘못이기에, 가르치며 바로 잡아야 할 일이다. 그래서 나는, 다른 어머님을 통해 이러이러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혹 선생님께서는 저희 아이가 다른 친구에게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하는 걸 보신 일이 잇는지 여쭈었다. 선생님께서는 현재까지는 그런 상황을 접한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저희 아이에게는 ‘장애인’이라는 말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맥락처럼 폭력적이고 비하하는 의미를 띄고 있는 게 아니라 가정 내의 일상 생활 속에서 사용되는 말이다 보니, 별 생각 없이 자기가 좀 빨리 미끄럼을 타고 싶거나 놀이 중에 친구의 행동이 느리고 답답해 보일 때 그런 말을 사용한 듯하니, 혹 그런 상황을 접하게 되면 잘 지도해 주시기를 부탁 드렸다.

선생님께 이런 말씀을 드리고 뒤돌아 나오는데, 평소의 무미건조하고 이성적인 성향인 나답지 않게 눈가가 촉촉해졌다. 장애를 가진 엄마 때문에 이 아이가 여섯 살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겁고 버거운 말을 다루며 힘들어야 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런 이유로, 장애부모들 중에는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다름을 아이에게 설명할 때 ‘장애’나 ‘장애인’이라는 말 자체의 사용을 회피하거나, 에둘러 간접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제법 있다. 이런 일을 겪고 보니, 나름 강철멘탈의 소유자인 나 조차도 그런 선택이 처음으로 조금은 이해가 가기도 했다. 하지만, 어차피 회피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사람들이 그 말 속에 담고 있는 의미의 사회적 컨텍스트가 우리 마음에 들건, 그렇지 않건 간에, 사람들은 우리를 ‘장애인’이라고 부른다. 그것도 철저히 가치 중립적인 그 말 속에 자신들이 사회로부터 학습하고 느낀 장애와 장애인에 대한 비하와 무가치와 무력함을 잔뜩 담아서, 그리고, 이응이는 장애를 가진 엄마인 나 ‘은진슬’의 아들이다. 이 사실이 바뀌지 않는 한, 나는 아이에게 이 상황에 대한 끊임 없는 이해를 구하고 아이를 도우며 이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때로는 그 말이 목구멍의 가시처럼 걸려 나를 불편하고 아프게 해도, 이응이 나이 3세 때부터 ‘엄마는 시각장애인’이라는 멘트를 마치 B사의 아이스크림 이름인 ‘엄마는 외계인’처름 열심히도 부르짖었다.

이렇게 자라온 내 아이에게 ‘장애인’이란 말이 어찌 다른 사람을 비하하고 공격하는 말일 수 있겠는가?

다만, 어떤 때 엄마가 잘 보이지 않아 다른 사람들보다 어리버리 느리게 행동할 때가 있고, 그걸 보며 성능이 우수한 눈을 가진 어린 마음에 속 터지고 답답한 경험은 당연히 있었을 터. 그저 비슷한 상황에서 그런 마음이 투영된 말일 뿐인 것이다.

심봉사임당 부모들의 말을 들어 보아도, 유아기 우리 아이들은 ‘장애인’이라는 말을 거리끼지도 않고, 특정한 의도, 별 생각도 없이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 아빠가 퇴근 길에 유치원에 아이를 데리러 갔는데, 너무도 천진난만한 웃음을 띄며, ‘시각장애인, 우리 아빠는 시각장애인이다!’라며 아빠를 당황케 하기도 하고,

집에서 엄마랑 아빠랑 아이들과 몸놀이를 하며 놀아주다가 코믹하게 부딪히는 상황이 발생하자, ‘시각장애인들끼리 충돌했다!’ 하며 웃는 통에, 오히려 엄마 아빠가 빵 터져서 더 웃었다는 이야기 등등…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끼리 내린 결론은, 우리 아이들은 별 생각 없이 일상적인 언어로 사용하는 것이지만, 장애라는 말의 사회적 맥락이나 함의가 너무 나쁘게 사용되다 보니, 다른 엄마들은 그런 말만 들어도 기겁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런 상황을 우리 아이들에게 알려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사용하지 않도록 알려 주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는 것이었다.

선생님께 그런 부탁을 드린 후, 이응이는 딱 한 번 유사한 상황에서 ‘야! 너 그렇게 하니까 꼭 장애인 같아!’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선생님께서는 아이를 불러 어떤 마음 때문에 그런 말을 친구에게 하게 되었는지 물으셨고, 아이는 친구가 하는 행동이 답답해서 그랬다고 했단다. 아무리 답답하다고 해도, 친구에게 그런 말을 하면, 친구의 마음은 어떨 것 같냐고 물으니, 여섯 살 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긴 시간을 집중하며 혼자 진지하게 생각하더니, 자신도 무언가를 깊이 깨달은 듯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고...

이 날의 선생님과의 진지한 대화 후로는 단 한 번도 그런 일은 없다고 한다.

지면을 통해, 함께 아이를 키우는 비장애 부모님들께 이해를 구하며 정중히 부탁 드린다.

혹시, 장애부모의 유아기 비장애 자녀가 친구들 사이에서 ‘장애’ 혹은 ‘장애인’이라는 말을 사용하더라도, 전술했던 환경적 상황을 고려하여 욕이나 언어폭력 같은 것으로 함부로 낙인 찍고 단정하지 말아 주었으면 한다.

얼마 전, 우리 아이가 무슨 말 끝에 ‘이노무 새끼’라는 말을 하는 걸 듣고 내심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짐짓 놀란 맘을 감추며 그런 말은 어디서 들었냐고 가볍게 물으니, 유치원 친구 누구누구한테 들었다고 했다. 그 친구가 할머니와 가깝게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충분히 어르신들이 말썽 부리는 아이들에게 별 뜻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말이기에, 그저 무심한 듯 아이에게 그런 말은 예쁜 말이 아니니 사용하지 않도록 하자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는 문득 생각했다.

선생님들이 도움반(특수학급)의 아이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며 아이들은 장애인에 대한 인권감수성을 배운다. ⓒfreepick

장애인 같아 vs. 이노무 새끼.

과연, 어느 쪽이 더 폭력적일까?

또한, 초등학교나 청소년기 아이들이 서로 친구들의 우스꽝스런 모습이나 잘 못 나온 사진 같은 걸 보며, ‘야! 너 애자 같아.’, ‘야! 너 완전 장애인이야.’,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에 대해서도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이것이야 말로 진짜 언어 폭력이 아닐까? 그 말을 듣는 상대에게나,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 장애인에게나 말이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 강의를 가면 웃으면서 아이들에게 이런 얘기를 해 준다.

여러분들이 버스 안에서 조금 우스꽝스럽거나 이상해 뵈는 친구에게 장애인 같다, 애자다 이런 식으로 놀릴 때, 불쑥 뒷자리에서 선생님이 나타나, ‘누가 나 닮았다고?’라고 물을지도 모르니 조심하라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학교 선생님들 중에 말썽꾸러기 아이들을 훈육할 목적에서 ‘너 자꾸 그렇게 말썽 부리면 도움반(특수학급)으로 보내 버린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제발 그러지 말아 주시기를 부탁 드린다. 선생님이 도움반과 그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며 아이들이 장애와 장애인에 대한 인권감수성을 배울 것이기 때문이다.

유난히 쓰기 힘들었던 이번 칼럼을 마치며, 생각해 본다.

과연, 장애라는 말이 뭐가 어때서 이렇게 사회적으로 다루기 까다롭고 힘든 단어가 되어 버렸는지 모를 일이다.

서자인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듯, 우리 사회가 우리가 가진 잘못된 생각과 모순 때문에 장애인을 장애인이라 편하게 부르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내가 늘 이야기 하듯, 장애란 말은 사용하면 안 되는, 예의에 어긋나는 나쁜 말이 결코 아니다. ‘장애’란, 그저 한 사람의 신체적, 정신적 상태를 나타내는 가치 중립적인 말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이 ‘아프게’, 혹은 ‘나쁘게’ 들리는 것은,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부정적인 생각, 나쁜 마음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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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슬 칼럼리스트 세상이 너무 궁금했던 나머지 7개월 만에 급하게 세상 밖으로 나오는 바람에 시각장애와 평생의 불편한(?) 친구 사이가 되었습니다. 언어로 연주하고,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20년 정도 피아노와 뜨거운 사랑을 했지만 첫사랑은 대게 이루어지지 않듯 그 사랑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아 헤매던 끝에 지금은 장애, 음악, 보조공학 등에 관련된 글을 쓰고 번역도 하고 있습니다. 유치원, 학교, 기업체 등에 찾아가 장애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스토리텔러(storyteller) 역할도 하고 있지요. 가끔은 강의의 전달력을 높이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기도 한답니다. 다섯 살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저는 우리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서는 장애와 다름이 좀 더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더 열심히 글을 쓰고, 강의를 하며, 연주도 하고 있습니다. 눈이 나쁜 대신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더 예민하고, 커피와 독서,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다섯살 아이 엄마가 들려 드리는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은 아이 키우는 이야기 한 번 들어 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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