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이철규(사진 왼쪽) 열사와 故 이내창(사진 오른쪽) 열사. ⓒ이상호

27년 전 추석이었다.

그 해 5월 10일 광주 청옥동 제4 유원지에서 입가에는 혈흔이 있으며, 온 몸에는 구타 자국과 혈흔이 있는 시체가 발견 되었다. 조선대 교지 편집 위원장이었던 이철규 열사의 시신이었다.

수십 년이 지나 의문의 사망 전 조선대학교 교지 '민주조선' 편집위원장 이철규씨(사망당시 25세)가 민주화운동 명예 회복 및 보상대상자로 결정됐다. 즉 그의 민주화운동 전력은 인정하나 사인으로 추정됐던 국가에 의한 의문사는 아직도 규명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 소식은 전국의 대학으로 흩어져 캠퍼스마다 단식 농성이 줄을 이었고, 시민들의 모금 역시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각 지역마다 불과 단 며칠 만에 몇 천만 원이 모금됐다.

건달 K에게는 지루한 싸움을 예견하는 불행한 일이었다. 분신, 투옥, 고문 등의 단어들이 학 내에 회자되고, 그것은 풀리지 않는 화두처럼 온 교정을 서러운 죽음처럼 어둡게 감싸고 있었다.

K에게 그것은 놀기만 하기에는 뒤숭숭함을 안겨 주었고, 그렇다고 뛰어들기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다만 학생운동을 영웅담처럼 되뇌는 몇몇 동급의 건달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다.

잘은 모르지만 운동을 영웅담이나 자뻑(자기가 자기에게 뿅 간다, AIDS나 호환마마 보다 더 무섭다고 한다 – 아재 개그 12장 112절) 수준에 반찬거리로 다룰 일은 아니라는 것쯤은 눈치 채고 있었다.

그렇다고 언론에서 게거품을 물고 떠드는 용공좌경 사상에 물들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K 가 감당하기에는 그들은 너무 심각했다. 그렇게 어정쩡한 모양새로 학 내를 떠돌던 K를 선배들이 한심하게 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당시 대학생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두 가지뿐이었다. 열나게 데모 질을 하던가, 쌩 까고 학업을 이어가던가! 그 어디에도 적을 두지 못했던 K를 한심하게 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낮술에 취해 있는 K는 농성장 뒷정리를 도와달라는 제안을 선배들에게 받게 된다. 개 한 마리를 인간으로 만들어 나가는 과정의 시작(?)이었다.

이 철규 열사 의문사 진상 규명 및 독재정권 타도를 위한 단식 농성은 캠퍼스를 벗어나 시내 중심지까지 이어졌다. 아니 통곡이 이어졌다.

시내 중심지를 오가는 보수적인(?) 할아버지, 할머님조차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여고생이며 심지어 중학생까지 영정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들에게 이철규 열사는 생떼 같은 내 자식이며, 오빠이며, 형이었다.

그들은 정권에게 침묵으로 물었다.

왜 박종철, 이한열 같은 대학생을 고문과 최루탄으로 죽이는 것도 모자라 의문사라는 미명아래 생떼 같은 이 땅의 청춘들이 저수지에서 바닷가에서 온 몸에 피멍이든 체 시신으로 발견되어야 하느냐고...

K에게 이상했던 것은 농성의 모습이 대학생이 중심이 아닌 시민이었으며, 최루탄, 투석전으로 이어지는 늘 보던 집회의 풍경은 더더욱 아니었다.

농성의 중심은 비폭력 무저항인 단식이었으며, 폭력적 자극을 일삼던 경찰도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시민들이 가져다 준 식수와 김밥, 모금 등이 넘쳐 났다.

K는 단식농성장을 피해 하루에 한번쯤 김밥과 물을 목구멍에 우겨 넣었다. K에게 단식 하시는 분들 만큼 시대의 비극은 그의 내성과 심안사이에서 차곡차곡 쌓여 갔다. 왠지 그 비통함만큼 시대와 국가는 대답이 없었다.

그리 부자일 것 같지 않은 가난 사람들의 비통함과 통곡만이 뜨거운 아스팔트에 쌓여 갔고, 그것은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 해 8월 15일 중앙대 이내창 열사가 바닷가에서 피멍이든 체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정국을 들끓게 하리라던 두 청년의 죽음은 예측을 빗나가 추석을 기점으로 점차 열기가 사위여 갔다.

얼마 남지 않은 추석을 기점으로 시내 농성장은 철수 되었고, 진원지이었던 캠퍼스에서 조차 싸움의 끝을 목도해야 했다.

평가의 뒷자리는 술이었다. 패배도 아닌 승리도 아닌 모양새로 추석을 맞아 각자 지역으로 내려가 열사정국을 선전하자 정도가 대안이고 실천이었다.

1989년 9월 14일 추석!

K가 있던 곳에서 서울까지의 시외버스비는 800원이었다.

두 명의 청춘의 죽음을 길거리에서 보내고, 대안도 없는 답답한 평가 뒤에 찾을 수 있는 것은 술이었다. 지난한 술자리 이후 각자의 고향으로 떠나던 길의 마지막에 남은 K는 800원이 없었다.

숫기가 없던 그는 농성 내내 하루에 한 번 김밥과 물을 목구멍에 우겨 넣는 것으로 버텼고 그 마지막에는 그 역시 22일간에 단식으로 마감했다.

싸움 이후 이어지던 술자리에서도 서울로 올라 갈 차비를 챙기지 못했다. 얼마 간 내려온 향토 장학금(용돈?)은 남김없이 후배들의 술값으로 털어 넣은 것 까지는 좋았으나 그 빌어먹을 800원을 챙기지 못했다.

학교는 추석을 맞아 지나치리만치 을씨년스러웠고, 터미널에서 가면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리라는 그의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대략 학교에서 터미널까지 7km정도이었으나 신체구조가 더러운(장애?, 사회구조도 여전히 더럽다!) K에게는 간단치 않은 길이었다.

마침 학교로 돌아오는 길은 비님이 추적추적 내려 더욱 을씨년스러움을 더했고, 그것은 왠지 모를 서러움까지 이어졌다.

학교에 겨우 도착한 그 날, 아무도 없는 을씨년스러운 교정에서 명절이 끝날 때 까지 몇 날을 또 다시 굶어야 했다. 이후 27년간의 추석은 때로는 서러움으로, 때로는 빨리 지나쳐 갔으면 하는 날이었다.

또한 일부러 라도 혼자 있는 시간을 만들어 냈다. 27년 전 청춘의 어느 날!

길거리에서 사체로, 억울한 죽음으로 보내야 했던 두 열사의 그 날과 몇 달을 통곡으로 이어냈던 뜨겁고 답답했던 여름과 추석을 죽기 전까지 잊지 않기 위함이었다.

마치 그의 앞길이 그러할 것이라는 예측처럼 말이다. 27년 전이었던 1989년 9월 14일 추석은 2016년 9월 14일 추석을 맞아 똑 같은 모양새로 돌아왔다.

장애인당사자가 겪는 현저히 역할 없음으로 다가왔던 유년의 추석처럼, 20대의 분노가 승리로 닿지 않았던 1989년 9월 14일의 추석처럼, 27년 만에 똑같은 날에 다가온 2016년 9월 14일에 추석처럼,

장애인당사자의 삶이 분노와 저주의 간극을 삶의 끝자락까지 이어갈 것임을 미리 알아냈던 유년의 추석처럼,

그 유년과 청춘이 1989년 9월 14일과 2016년 9월 14일에 과거와 오늘을 예단할 것이라는 800원에 서러움이.

PARADOX(모순과 모순의 불일치) 혹은 뒷 담화

동네에서 조용히 살고 있다.

다만 장애계에 불만인 것은 장애운동이 옛날 같지 않다는 말을 십 년째 되 뇌이고 있다는 것이다. 중앙이 문제가 있으면, 지역을 강화 할 일이고, 전선은 맛이 갔으면 지역에서 진지를 구축 할 일이다.

주류사회는 의도하지 않은 체로 스스로 진화하여 재탕, 삼탕 진부한 과거형의 동음이의어를 사랑과 동정으로 유포하고, 장애인당사자들은 부정수급으로 호도 당한체로 제한된 먹잇감에 신음하고 있다.

그것이 범죄라 쳐도 종교적 순결성을 강요할 만큼, 장발장 범죄를 단죄할 만큼 주류사회는 도덕적인지 묻고 싶다.

주류사회는 더욱 더 영악해져 진실을 모순으로 호도하는 방법까지 찾아내는 기묘한 초능력(?)까지 생산한다. 진실을 모순으로 역행시키는데 아주 효과적인 방법들을 찾아내고 있다.

이념과 가치, 철학이 사라진 시대에 모두 도인이 되라며 인문학 바람이 불고 있고, 그것은 불과 몇 년 전 실패로 끝났던 희망, 그 수많은 자기개발서 열풍이 참담함으로 끝난 것을 애써 감추고 있다.

이제 장애인당사자만 불행인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 모든 계층(청춘, 어르신, 명퇴자, 몰락할 수밖에 없는 자영업자 등)의 불행을 예고하고 있다.

아니 이미 덫에 걸렸을지 모른다.

이제 장애인당사자는 80년대 수많은 자살을 통해 해냈던 묵시적 항거와 이를 통한 의식적이고 조직적이었던 장애운동의 탄생과 진화를 배경으로 절대적 빈곤이라는 사회적 책임에 대한 위대한 도전과 성취가 일단락되고 있다.

2000년 대 소강상태에 머물렀던 주류운동과는 다르게 혁명적인 중증장애인 중심의 I.L. 운동도 일부의 부정수급이라는 도덕적 치명타와 절대빈곤이라는 절대적 명제가 다양한(?) 위기에 봉착되어 있는 한국사회의 계층과 더불어 상대적 소외로 돌아선 것으로 주류사회는 인식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장애인당사자만 불쌍한(?) 것이 아니며, 모두 힘든 과정을 거치고 있으니 참으라는 것과 일부 장발장 범죄(?)까지 덧 씌워 제한된 먹잇감이라는 진실을 모순화 시켜 장애운동의 진앙지를 어둡게 감싸고 있는 것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지구를 지킬 수는 없겠지만 동시대를 신음하고 있는 청춘들과 선배시민들이 지역에서 어우러져 진지까지는 아니더라도 항구적인 공동체쯤의 책무는 다하고 죽고 싶다.

또한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운동이니 뭐니 까불었다면 한 개인을 쎄게 돕고 죽고 싶다.

27년 전을 각인 하며 말이다.

이제 곧 2016년이 저문다!

늘 그런 사람이 아닌............

진보까지는 아니더라도 진화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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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운동을 한다는 것은 유전적으로 무척 훌륭한 DNA가 없다면 기실 불가능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항상 화려함을 강점으로 한다. 재벌을 비난하지만 재벌에 편입되고 싶은 욕망과 일치한다. 물론 loser(루저: 패배자, 손해 보는 사람)가 재벌로 편입되는 일은 통계학적으로 잡히지 않을 만큼 불가능하다. 자본의 입장에서 천박하거나 가난한 것은 화려한 조명아래 어두운 그늘이 된다. 물론 그것을 들여다보거나 살펴보려하는 용기를 가진 이는 드물다. 주위를 살펴 볼 만큼의 여유는 자본의 입장에서 허락되지 않는다. 하루하루 링거를 꽂은 채 연명치료를 하는 모양새로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 이후로 대한민국은 늘 울고 있다. 마치 타이게투스산(고대 스파르타인 들이 불구자 혹은 원치 않은 아이들을 버렸던 산의 이름)에 울려 퍼졌던 통곡처럼, 누군가는 타이게투스산에 울렸던 통곡을 대신해야 하지 않을까? 헛소리를 넘어서는 수준에서 통곡을 대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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