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해야 했다. 무대에서 내려와 실패한 모델이 될 것인가 이 모습으로 일어나서 끝까지 할 것인가

나는 그렇게 했다. 보통 사람은 인생에서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서 계속 걸으니까.

When real people fall down in life, they get right back up, and keep on walking...

-미국 드라마 <"Sex and the City 시즌 4 에피소드 2 The Real Me"> 중에서-

엊그제, 한양대학병원 안동현 교수님을 뵈었다. 정기검진이니 특별할 일도 없고 그다지 달라질 것도 없었다.

울 아들 세살 반 때 처음 진료 받던 작은 사무실이 최근 널찍하고 경관이 좋은 곳으로 바뀐 것, 그리고 유난히 까맣게 염색하신 교수님의 머리 말고는.

사실 십년이 넘는 세월동안 바뀐 건 참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널뛰기를 했던 건 내 마음이었던 것 같다. 아무 것도 모른 채로 첫 진단을 받으러 왔을 때, 이 분야의 전문가이신 교수님이 신적인 존재 같았고, 교수님 말씀만 들으면 다 될 것으로 여기며 존경했고 권유하시는 치료기관에 등록하여 수업도 들었다.

그러나 1년이면 끝날 줄 알았던 일들이 시간이 갈수록 길고 길어지는 일이 된다는 것만 인식하게 될 뿐이어서 그 다음엔 언제나 선생님들께 공손하고 늘 경청하고 존경했던 마음들이 도리어 원망으로 변하여갔던 것 같다.

예의바르게 인사하는 대신, '의사들도 선생들도 아무 것도 몰라. 제대로 해주는 것도 없어. 그냥 내가 필요한 일이 있으면 가서 그것만 요구해서 받으면 그 뿐이야' 이런 생각 속에 이런 저런 질문에 답은 안하고, 내가 필요한 것만 말하며 무례하게 대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이 자리이다. 왠지 처음 뵈었을 때도 연세가 있으셨었는데 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이 자리를 지켜주시는, 이 작은 사무실을 지키며 부모와 아이를 상담해주시는 선생님께 왠지 그날따라 참 감사하고 마음이 짠해졌다. 늘 의례적인 이야기만 나누다 이 시간이 참 소중하지 않은가 싶어서 여쭈어보았다.

"교수님, 아이들을 수십년 동안 보아오셨잖아요. 그렇지만, 저는 이 세계에서는 답이 없다고 생각해요. 장애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이가 장애를 안고 자라고 있다는 것이요. 그래서, 다른 세상에서 답을 구하려고도 생각해 봅니다. 스웨덴보리 라는 사람이 있지요. 사후세계를 다녀온. 삼중고를 겪고 살아온 헬렌 켈러 여사가 그 분의 글을 읽고 희망을 얻었다고도 합니다. 교수님, 우리 아이들을 오랫동안 보아오고 돌보아주신 입장에서 이 세계와 다른 세계를 통틀어 그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

질문이 나아가도 참 멀리 나아갔다고도 생각했지만, 이 정도의 질문쯤이야 교수님 입장에서 현명한 답을 주시리라 여기며, 아니 실은 반신반의하며 여쭈어보았다.

"우리 아이들과 함께 자라는 형제 자매들이 있지요. 많은 경우에, 우리 아이들에게 관심이 집중되어 일반 형제들은 부모의 관심을 많이 못 받고 자라기도 합니다. 그 아이들이 우리 아이들을 보며 내 형제는 왜 그럴까 생각하며 힘들어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지만 또 어떤 아이는 내 형이 동생이 오빠가 누나가 힘드니 내가 더 잘 대해줘야겠다. 힘든 부모님도, 내 형제도 더욱 사랑해야겠다 고 생각하며, 생각이 깊어지고 사회에 나아가선 타인에 대한 이해심과 배려심이 훌륭한 아이로 성장해 가기도 합니다.

부모님도 마찬가지에요. 장애아이를 키우게 된 일이 행운은 아니지요. 그러나 그에 한탄하며 불행에 불행을 더할 것인가, 아니면 내게 주어진 삶을 더욱 깊게 생각하고 더 풍부하게 사고하며 감사하고 값지고 기쁜 삶을 택할 것인가 는 나의 선택입니다. 편하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고, 불편하다고 불행한 것도 아니라는 것. 아시지요? 답이 되셨을까요."

예. 이제야 비로소 저와 제 자리의 의미, 교수님과 교수님 자리의 의미를 마주하며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자랐습니다. 교수님.

얼마 전, 내 연락처로 대화를 요청한 이제 갓 서른이 넘은 아이 엄마가 있었다. 아이가 생후 2개월부터 눈 맞춤이 안됐음을 이 예민한 엄마는 인지했고, 세살이 된 지금까지 다른 식구들은 눈치 채지 못하며 언급하지 않지만, 작업치료를 보내고 이것저것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요즘 엄마들은 우리 아들이 어릴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통해 앞으로의 전개도 더 잘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 힘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다행히 나와의 대화 이후에, 다음 날 네일샵에도 다녀오고, 아이가 더 예뻐 보인다고 하니 조금은 도움이 된 것 같아 기쁘다. 그리고 계속 이따금 대화를 한다. 구의동 체육수업시간에 초대했으니 7월 중에는 얼굴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와 가끔 나누는 이런 저런 대화는 꼭 아이 이야기만이 아니다. 남편과 시댁과의 관계, 친정어머니와의 관계, 나에 대한 자책, 우울함, 절망감, 슬픔 등. '서른이면 정말 힘들 때인데 내가 지금 가지게 된 마음을 조금이라도 나누어줄 수는 없는 걸까.' 그러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려줄 수는 있어도 내가 지나온 세월에서 갖게 된 지금의 마음까지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 한없는 연민의 마음으로 늘 마음이 짠하다. 구의동 체육시간의 우리 엄마들과 함께 이야기 나누니 다들 같은 심경이다. 내가 많이 아파서, 깊이 아프며, 느끼고 넘어가는 지점에서 지금 우리의 편안함을 갖게 된다고 말이다.

아픔을 가진 채로 같이 사는 법을 배웠다고 할까. 아주 깊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 큰 아이의 아이짓을 유머로 삼으며 깔깔거리고 웃을 수 있게 되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결국, 공짜는 없었다는 것. 내가 지금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나누어주고 싶은 마음에 글을 쓰고, 대화를 청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해도, 아마도 홀로 있는 밤이면 그 마음이 아프고 아프리라는 것을 알기에 곁에 항상 함께 하겠다는 말 이외는 모르겠다.

이런 마음 중에,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미국드라마 베스트를 소개하는 프로를 보다가 이 장면을 보았다. 2006년에 방영된 드라마 ‘섹스앤더시티’ 중 시즌4의 에피소드2 이다.

주인공 캐리가 그렇게 사랑하던 돌체앤가바나의 패션쇼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높은 힐을 신고 나온 캐리가 무대에서 보기 좋게 나자빠진다. 짧은 순간, 그녀는 선택해야했다. 나왔던 곳으로 들어가 한탄하며 영영 실패한 모델이 될 것인가, 아니면 다시 벌떡 일어나 가던 길을 가야할 것인가. 그녀의 불행을 연신 사진으로 찍어대던 사진사에게도 한 마디 하고, 객석에서 격려해주는 친구들을 생각하며, 그녀는 넘어진 그 자리에서 일어나 계속 걸었다.

멋쩍은 표정, 그러나 당당한 워킹. 무사한 마무리까지 끝내고 관객도 피디도 그녀도 만족하며 패션쇼를 마친 그녀 정말 멋있었다. 그리고 그 때 깨달았다. 언젠가부터 내 머릿속에 맴돌던 내가 지어냈던 말이라고 생각했던 이 문구가 바로 이 캐리가 패션쇼에서 넘어졌을 때 했던 말이었다는 것을.

'내 인생이 어디서부터 어긋났던 것일까. 난 완벽하고 싶었는데 말이다. 대학도 내가 원하던 곳에 가지 못했다. 그런데 과연 내가 무얼 원하기나 했던 걸까. 삐걱 이고 어긋나버렸다. 완벽하고 싶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내 삶이 맘에 안 들어졌다. 망가진 이 상태에서 무얼 어찌해야 하는 걸까.' 늘 이런 생각에 빠져 있던 때였다. 상우에 대해 완벽히 인식하게 된 건 2005년 처음 안 교수님을 뵙고 나서부터 인데, 이때도 사실 인식이 덜 되었고, 거의 2006년 일 년이 더 지나서야 겨우 받아들이자고 했던 것 같다. 그 때 즈음 이 드라마를 보았다. 그리고 이 장면의 이 대사가 내 마음 속에 콕 박히며 그 이후 삶을 살아가고 지탱하는 힘이 되어주었던 것 같다.

"우리는, 늘 넘어질 수 있어. 그런데, 넘어진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앞으로 가는 것. 바로 그게 진짜 완벽한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야."

그래서 오늘 밤은, 서른 살인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우리, 오늘은 아이 이야기 말고, 살아가는 이야기 말고, 미드 한 편 보기로 해요.

캐리, 사만다, 샬롯, 미란다. 그녀들이 사는 걸 한 번 엿보기로 해요. 인생드라마가 될지도 몰라요.

힘내고, 더 사랑하고, 더 아끼고요. 아이를. 아니 그 이전에 나를.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나 뚜벅뚜벅 힘찬 걸음을 하게 될 내 삶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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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평범한 직장맘이자 새로운 세계, 장애아동을 키우는 삶에 들어선지 10년째다. 아들이 네 살 때 발달장애인 것을 인지하고 1년 휴직하며 아이 교육에 힘쓰는 한편 아이의 장애등록에 따른 고심과 장애를 받아들이는 일 등으로 마음을 추스르며, 장애가 단기간에 끝나는 것이 아닌 오래 가는 “길 장(長), 사랑 애(愛)” 임을 깨닫게 된다. 어린이집,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중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인 아들과 행복하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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