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신에게 재물을 바친다. 세계 어떤 종교를 보더라도 인간은 신을 숭배한다는 증표로 재물을 바치고 있다. 신은 인간보다 더 능력 있고 풍요로울 것인데, 왜 늘 부족하고 힘든 인간은 신에게 재물을 바칠까? 죽음이 없는 것이 신이며 식생활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 신인데 왜 재물을 바치는 것을 좋아할까? 적어도 신에게 식사는 즐거운 놀이일 수는 있어도 생명 유지의 수단은 아니다.

신은 재물이 필요하거나 부족해서 인간에게 재물을 바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재물은 인간이 신에게 숭배를 표시할 수 있는 수단이다. 재물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고, 그 필요한 것을 가치라 하며, 가치로운 것을 내어 놓는 것이 숭배의 표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재물은 신이 아닌 인간의 기준에서 재물인 것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재물은 필요한 것이고, 신의 입장에서는 필요 없는 것이니 신의 입장에서는 바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에 재물을 바치는 것은 중요하다.

카인은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아벨은 양치기였다. 에덴의 동산에서 떠나 인간은 일을 해야 했다. 일이란 바로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직업을 가진다는 것은 서로 다른 역할을 한다는 것이고, 인간이 사회화된다는 것이다.

농사란 자연이나 신의 도움이 가장 많이 필요한 직업이다. 적당히 따뜻해야 하고, 적당히 비가 와야 하고, 태풍과 같은 재난이 없어야 한다. 곡식과 과실이라는 열매를 주는 것은 땅이지만, 농사를 짓는 동안 하늘을 바라보아야 한다.

양치기는 양을 잘 관리해야 한다. 잃어버려서도 안 되고, 짐승에게 잡아먹히지 않도록 보호해야 하고, 살이 찌도록 잘 먹여야 하고, 질병에 걸리지 않도록 돌보아야 한다. 그리고 풀이 있는 곳을 찾아 떠돌아 다녀야 한다.

농사는 한 곳에서 정착하여야 하고, 토지가 필요하지만, 양치기는 한 곳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농사는 식물을 소출하고, 양치기는 육류를 소출한다.

소출은 모두 음식과 관련된다. 인간에게 최초의 재물은 모두 음식이었던 것이다. 집은 필요한 재물이지만 현재와 같이 재산으로서의 가치는 없었고, 집은 신에게 바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재물로서의 가치를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토지 역시 농사를 지으려면 필수적으로 가져야 하는 것이지만 과거에는 소유의 개념보다는 누구나 이용 가능한 공개념이었을 것이고, 처음부터 주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빈 의자에 앉는 사람이 주인인 것처럼 먼저 차지하는 자가 주인인 것이었을 것이다.

신은 왜 아벨의 고기를 카인의 풀보다 더 사랑했을까? 신도 식물보다는 육류를 더 좋아했던 것일까? 양은 풀을 먹는 것이니 먹이사슬 피라미드에 의해 이미 상하의 권력구조가 만들어진 것일까? 인류는 처음부터 자연으로부터 채취하기 쉬운 것보다 사냥이나 가축으로부터 얻는 육류가 맛이 더 있다거나 더 가치로 워서가 아니라 새로운 것이고, 매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곡식도 먹는 만큼 소모되고, 육류도 소모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곡식은 땅에서 얻는 것이지만, 종자가 좋아야 다음 해에 소출이 좋으니 가장 좋은 열매는 내년을 위해 보관해서 씨뿌리기에 사용한다. 우리말에 ‘드림’이란 높여서 제공한다는 뜻만이 아니라 씨를 뿌린다는 의미가 있다. 종자를 따진다는 것은 우생학을 지향한다는 의미이다.

양은 번식을 위해서는 좋은 종자가 필요하지만 종자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잘 먹여서 살이 찐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씨종자를 위한 양을 따로 정하기보다는 처음에 기를 것인가를 결정할 때에 질 좋은 상태를 선택할 것이고, 질이 좋은 고기는 키우는 사람이 잘 먹이고 잘 돌본 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동물의 우생학은 늦게 현대에 와서 발전한 학문일 것이다.

신은 좋은 것을 정성껏 재물을 바치는 것을 선택했을 것이다. 카인의 것은 받아들이지 않고, 아벨의 것은 받아들였다. 아벨의 이름에서 허무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양치기는 풀을 찾아 온 세상을 떠돌아다닌다. 그러니 허무함을 알고 있는 자유분방한 낙천적 존재였는지 모른다. 아니면 아벨의 운명은 허무한 인생이 이미 결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신은 왜 둘 다 받아들이지 않고 아벨을 선택했을까? 인류 최초의 차별이 여기서 시작된다.

농사를 짓는 것이 위험성은 적지만 훨씬 더 많은 땀을 흘리고도 자연의 도움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더 안정된 것이다. 양치기는 외로움이나 다리의 아픔은 더 했겠지만 자유롭고 낙천적일 수 있다.

고기이냐 풀이냐는 다름이고, 재물로 남에게 사랑을 받느냐의 문제는 차별이 되었다. 카인은 이 차별로 인하여 질투심에 불탔고, 결국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만다. 자신의 일터인 들로 데리고 나가서 그 현장을 보여주고는 일을 저지른다. 신은 카인에게 생명을 빼앗음으로써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지 않고, 삶의 터전인 땅을 떠나 더욱 고생스럽게 살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인이 이민족들에게 죽음을 당하지 않도록 표식으로 보장해 주었다.

이것은 가해자에게도 인권이 있음을 인정한 것은 아닐까? 세상살이는 선택의 문제다. 상을 준다면 최우수가 하나일 수밖에 없다. 신에게 있어서도 선택의 문제로 둘 다 선택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카인이 질투를 하든, 아벨이 질투를 하던 누군가는 질투를 하는 입장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생산과 노등을 근간으로 하는 인간사회에서는 그것의 가치를 가지고 차별이 존재한다. 인간은 이 차별을 카인과 아벨시대부터 시작하여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과제다. 신은 바로 이것을 해결할 과제를 주고 카인을 살려 준 것이다.

차별을 극복하지 못하면 갈등과 불균형이 생기고, 결국은 인간이 해서는 안 될 범죄가 생기며, 더욱 어려운 고난이 기다리고 있게 된다. 이 고통은 차별을 받는 사람이나 차별을 한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다.

장애인도 사회적 역할이 있으며, 자기결정권을 가진 존재이다. 이 사회는 장애인을 차별함으로써 또 하나의 카인과 아벨을 재생산하고 있다. 그러나 신은 카인과 아벨 중에 하나를 선택하지 않았다. 카인에게 과제를 주고 생명을 보장해 준 것이다.

양심은 예방적 기능보다는 사후의 처리의 기능을 한다. 카인도 질투에 불타고 있을 때에는 전혀 작동하지 못하다가 동생의 죽음을 보고 작동하기 시작하여 두려움에 떨며 숨어 있었다.

완전성을 갖추지 못한 인간은 교육을 통해 조금 더 완전성에 다가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그 교육은 고기를 기르는 법이나 농사를 짓는 법에 그치고 있어 오히려 사회적 모순의 불합리성을 수용하고 내재화하며 재생산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장애인은 생산과 노동이라는 측면에서 약자이고, 불리한 입장에 있다. 이 불리한 장애인을 사회는 차별한다. 그리고 카인과 같이 범죄를 저지를 위험성이 있다고 낙인화 하고 멀리 한다. 신도 차별을 한 것이니 차별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차별을 없애는 과제를 신은 인간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동생을 죽이는 엄청난 사건의 가해자라 할지라도, 사회의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 편의제공이 필요한 존재라 하더라도 결국 보호받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국가나 개인은 재물을 내어 놓아야 하는데, 오히려 인간사회는 장애인을 재물로 하려고 하니 신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에덴의 어원은 변두리 언저리이다. 바로 주류화가 아닌 소수자가 복된 곳임을 신은 계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누구의 것이 어떠하냐의 기준에서 차별하여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발생한 차이나 다름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의 선택을 신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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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환 칼럼니스트
현재 사단법인 장애인인권센터 회장, 한국장애인고용안정협회 고용안정지원본부장을 맡고 있다. 칼럼을 통해서는 아·태 장애인, 장애인운동 현장의 소식을 전하고 특히, 정부 복지정책 등 장애인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이슈에 대해 가감 없는 평가와 생각을 내비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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