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장애 자녀를 둔 엄마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 ‘그래, 엄마야’를 읽었다. 나는 매일 직장에서 장애아와 엄마들을 만나고, 집에 와서도 장애아들과 종일 지내기에 이 책에 그다지 호기심이 가진 않았다. 하지만 비장애인들도 선호하지 않을텐데, 나라도 사서 읽어줘야 책 만든 이들에게 힘이 되지 않겠나 싶은 마음으로 주문하였다.

이전의 장애인 부모들이 쓴 책과 조금 다른 점이라면, 자녀의 재능을 꽃피운 성공스토리도 아니고, 장애운동으로 헌신한 특별한 부모의 이야기도 아니며, 일반 사회의 기준에서 보면 드물고 먼 언저리에 있는 이들일지 모르지만 장애인 가정들 중에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엄마이기 전에 한 여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방황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며, 헌신적인 모성애라는 사회적 시선 뒤에 가려진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인터뷰한 형식이었다.

시부모님과 남편에게 섭섭했던 점, 직업과 양육 사이에서 아직도 갈등 중인 점, 비장애인들의 시선 뿐 아니라 같은 장애아 부모들과의 사이에서 겪는 시각 차이들, 이러한 크고 작은 상처들과 관계의 어려움들을 별 여과 없이 솔직히 드러내는 주인공들이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나는 직업적으로 다른 이들의 어려움을 들어주고 도와주는 역할에 늘 매여 있어서, 사석에서 동료 장애아 부모들을 만나도 나의 어려움들을 선뜻 터놓는 게 쉽지 않다. 그래서 이 책 속에서 때로는 하소연으로, 때로는 일러바치듯, 때로는 눈물과 분노로 나 대신 나와 똑같은 경험들을 풀어내는 이야기들에 소심하게 대리만족하며 가볍게 책장을 넘겼다.

그런데, 한 미혼모의 사연에서 넘어가던 책장이 멈췄다. 그녀의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심장기형으로 횡경막에 구멍이 나있었고, 입술이 붙어서 구순열 수술을 해야 했고, 아직도 수시로 경기를 하는 최중증 발달장애인이었다.

복지재단 등에서 모아준 성금으로 심장수술을 시키고 무사히 고비는 넘겼지만, 기초생활수급비인 월 58만원으로 아이 치료와 생활까지 감당해야하는 그녀는 하루에 한 끼 식사만 하고 지낸다 하였다. 그 부분까지는 그냥 안타까웠다. 그런데 미혼모가 되기까지 과거의 사연들을 읽다가 나는 내려야할 지하철역을 두 정거장이나 지나쳐 버렸다.

그녀의 아버지는 도박을 하며 어머니에게 잦은 폭력을 휘둘렀고, 어머니는 그녀를 데리고 외가댁으로 도망 왔다가 새살림을 하러 홀로 떠나가 버렸다. 외가댁에 남은 그녀는 다시 외삼촌에게 폭행을 당해 가출을 했고, 미성년자여서 최저시급도 안되는 알바를 전전하다 술집으로 들어가고, 거기서 우연히 만난 고등학교 때 남자친구의 도움으로 빠져나와 동거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기대했던 행복도 잠시 뿐 남자친구도 도박과 폭행을 시작했고, 그녀는 임신한 줄도 모르고 또다시 집을 나왔다. 그리고 미혼모 쉼터에서 장애아이를 낳고 지금껏 홀로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말한다.

“미혼모 시설에서 만난 친구 중에 아기 심장이 좌우반대로 되어 있어서 억대의 수술비가 필요한 엄마가 있었어요. 그래도 키우고 싶어 했는데, 수술비 마련을 못해서 8개월 만에 죽은 아기를 일주일이나 껴안고 있었대요.”

자신보다 더 안타까운 친구의 이야기를 하며, 그래도 자신에게는 유일한 가족인 아기가 있음을, 아기와 살기 위해 자신도 건강해지고 싶음을, 기술도 배우고 싶고, 오늘도 살아있어 숨 쉴 수 있음이 참 좋다고 말하는 그녀를 읽다가 나는 지하철 안에서 눈물을 쏟고 말았다.

세상을 탓하고 싶지 않다. 그녀의 부모를 욕하고 싶지도 않다. 외삼촌과 남자친구, 그 어리석은 이들을 따지고 싶지도 않다. 단지 나는 그녀를 이야기하고 싶다. 사랑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만신창이가 된 채로 길가에 버려진 한 여인을 살려내고, 회복시키고, 희망으로 미소 짓게 하는 힘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나보다 더 약한 존재, 나 없으면 살 수 없는 유일한 존재, 세상에서 가장 낮은 모습으로 태어난 장애아기를 끌어안고서야 그녀는 자신의 가치, 삶의 의미, 사랑의 근원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 엄마야' 인권기록활동네트워크 '소리' 지음, 전국장애인부모연대 공동기획. ⓒ김석주

예전에 우리 가족이 다녔던 교회에는 근처 고아원에서 오는 학생들이 있었다. 안정된 복지지원으로 교육이나 생활수준 면에서는 일반 가정들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상처와 외로움이 있는 아이들이기에 자신들끼리의 결속력이 강하였고, 더 센 척하며 스스로를 방어하려는 모습을 종종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늘 엎드려 잠을 자고 의욕 없이 건들건들하던 한 남학생이 예배를 마친 후, 내 아들 손에 슬쩍 무언가를 쥐어주고는 황급히 뛰어가 버렸다. 가까이 가서 보니 막대사탕 두 개였다.

그 후로도 그 학생은 남들이 안보는 사이에 몰래 과자나 사탕 같은 것들을 아들에게 쥐어주곤 했다. 말도 할 줄 모르고, 산만해서 돌아다니고, 친구 한 명 없이 소외되어 보이는 내 아들이 그 학생의 눈에는 안쓰러웠던 것이다. 사랑은 많이 가진 자가 자기 이름 드러내며 던져주는 동정 같은 게 아니다. 자신이 가진 게 없음을 알기에 타인의 소외와 아픔까지 공감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또 한 명, 경한 지적장애와 분노조절장애를 동반한 고등학생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알코올중독과 폭력을 일삼다 돌아가셨고, 그의 어머니는 생활고까지 겹으로 시달려 심적으로 고립된 상태였다. 그 학생은 어른들이 훈계와 비난조로 자신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 늘 화가 나있었고, 때로는 욕설을 퍼부으며 폭력적인 자세를 취하곤 했다. 그러나 그도 내 아들에 대해서만큼은 늘 자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앞 등교길에서 그 학생이 큰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영빈이 때린 놈 누구야? 다 나와! 내가 가만 안 놔둘거야!”

“어머나, 네가 여기 웬일이니?”

“아, 네에. 영빈이가 얼마 전에 친구들한테 맞았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그 일은 다 해결되었단다. 친구들이 사과하고 화해했으니 괜찮아.”

“그래요? 다행이에요. 다음에 또 이런 일 생기면 제가 막아드릴게요.”

그 학생은 종종 나에게 화 나는 감정을 어떻게 다스리면 좋을지를 물었고, 성실하게 하루를 보낸 날에는 칭찬받고자 전화를 걸어오곤 했다. 그리고 영빈이에게 좋은 형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다짐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건 훈계나 지적이 아니다. 아무리 행동이 거칠고, 지능이 낮다 해도 그 속 깊은 곳에 숨은 선한 의지, 그 가치를 인정하고 일깨워줄 때에야 스스로 회복할 힘을 얻는다.

위의 미혼모와 고아학생과 분노조절장애학생의 이야기는 곧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돈과 명예, 성공과 경쟁, 남들이 치장해놓은 그럴싸한 황금을 좇다가 그것을 움켜쥐는 순간 한낱 차갑고 공허한 돌덩이일 뿐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모습으로 태어난 아이를 덥석 안을 때, 아, 뜨겁고 충만하게 뛰는 가슴을 느끼게 된다.

돈을 벌든, 일을 하든, 양육을 하든, 의미 없던 모든 시간이 가치 있어지고, 아름다워지고, 강하여 진다. 나는 모두에게 이것을 알려주고 싶다. 가장 약한 자를 품을 때 누리는 아프고도 행복한 사랑을 이야기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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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주 칼럼니스트 청년이 된 자폐성장애 아들과 비장애 딸을 둔 엄마이고, 음악치료사이자 부모활동가로서 다양한 유형의 장애인들을 만나고 있다. 현장의 문제와 정책제안, 장애인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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