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0일, 나는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의 6세와 7세 전체 학급을 대상으로 장애의 이해 수업을 진행하였다.

사실 아이 입학 전에도 이 유치원에서 강의를 했던 터라 이제 학부모도 되었으니 이런 요청이 있을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는데, 원장 수녀님과의 학부모 면담 날에도 말씀이 없으시기에 올해는 안 하시려나 하고 긴장 풀고 있던 중, 상담 다음 날 아침 등원길에 부탁을 하셨다.

강의 의뢰를 받고 많이 망설였다. 작년에야 그저 프로페셔널로서 일을 한 것이지만, 지금은 아이가 이 기관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건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의 다름인 것이다. 아이 등원 길에 의뢰를 받았을 때 수녀님께는 전혀 갈등하는 기색도 없이 ‘하겠습니다.’ 라고 답변을 하면서도 내 머리는 여러 가지 갈등과 고려해야 할 문제들로 LTE급으로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여기서 이 갈등 상황을 자세히 기술하려는 이유는 앞으로 이런 문제에 직면하게 될 장애 부모들에게 참고가 될까 싶어서이다.

아이가 다니는 곳에서 의뢰 받은 강의는 나에게 여러가지 갈등과 고려해야 할 문제를 주었다. ⓒ은진슬

1.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솔직히 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이 기관에 내 아이가 다니고 있는데, 이 일이 내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그 간의 강의 경험을 통해 어느 정도는 예상 할 수 있어서 였다. 유아의 특성상, 수업을 들은 아이들이 아직은 미성숙하기 때문에 아무리 유아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수업을 진행한다 해도 내용의 맥락을 모두 이해할 수가 없고, 이로 인해 단편적으로 각인된 정보만 가지고 내 아이를 놀리거나 상처를 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불확실한 위험에 아이를 노출시키기에 만 4세는 아직 인지·정서 발달상 너무 어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한다는 마음도 컸다.

내가 대학 때부터 해왔던 장애에 대한 스토리텔링, 요즘 유행하는 말로 ‘장애인식개선 교육’(나는 이 강의명이 맘에 들지 않는다. 마치, 모든 비장애인들이 잘못이 있고, 그걸 뜯어 고쳐야 한다는 듯한 느낌이 싫기 때문이다.)에 아이를 낳고부터 새삼스레 애정을 갖고 집중하기 시작했던 이유도 바로 이런 때를 위함이 아니었던가?

아이 엄마가 된 이상, 그것도 장애 엄마인 이상,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서는 남과 다르다는 것들, 장애를 가졌다거나 머리색깔이나 눈 색깔이 나와 다르다거나 하는 것들이 지금보다는 조금이나마 더 편안하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 아니었던가?

내 강의를 통해서 내 아이가 한국 땅에서 장애를 가진 엄마 때문에 상처 받는 일이 조금이라도 줄어 들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조금은 불편하고 우려스럽더라도 당연히 감수하고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더욱이, 학부모로서 내 아이를 맡아 성심껏 교육해 주시는 기관에서 의뢰 받은 일에 이유야 어찌 되었건 간에 ‘No’라고 쿨하게 대답할 수 있는 엄마가 과연 몇이나 될까?

2. 강의를 할 경우, 내 아이가 속한 클래스를 포함 시킬 것인가, 말 것인가?

학부모 입장이다 보니 이 문제를 의뢰 받는 순간부터 제일 먼저 고민했었는데, 다행히 이 문제는 원장 수녀님께서 알아서 해결해 주셨다. 내게 강의를 의뢰하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로 만 3세 반들은 아직 너무 어려서 제외하고 4, 5세 전체 학급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정리를 해 주셨기 때문이었다. 고민 거리를 하나 줄여 주셔서 어찌나 감사하던지…

3. 내가 무지개반 이응이의 엄마라는 걸 밝힐 것인가, 말 것인가?

당시 통화 중에 수녀님께서는 내가 무지개반 이응이 엄마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 좋을지, 안 밝히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물어봐 주시기에 그 고민도 편하게 말씀 드리고 내려 놓을 수 있었다.

사실 작년 강의 때는 이응이를 유치원에 데려가기까지 했던 나이기에 나 개인으로서는 이 문제에 대해 별 거리낌이 없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아이들이 아직 너무 어리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 자칫하면 이응이가 유치원 전체 6, 7세 형아 누나들로부터 엄마가 장애인이라고 집단으로 놀림을 받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그건 밝히지 않고 진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또한 다른 학부모들 사이에서 이 상황이 어떻게 오르내릴지도 조심스러웠던 것 역시 사실이다. 수녀님 역시 강의를 부탁하시고도 내 입장이 너무 독특하기에 많은 고민과 배려를 하시는 듯했다.

작년에는 그렇게도 즐거운 마음으로 내 아이 같은 예쁜 아이들에게 좋은 것을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고 싶어하며 진행했던 강의였는데….

똑같은 기관, 똑같은 대상에게 똑같은 마음으로 하는 강의가 어찌 이리 다른 무게로 와 닿던지…. 그 때의 나나 지금의 나나 똑 같은 나이고, 그 때의 이응이와 지금의 이응이도 똑 같은 이응이건만, 관계의 한 끝 차이로 이렇게 무겁고 힘든 일이 될 줄이야, 이래서 부모의 자리가 무겁고 힘든 거라고 어른들이 말씀하신 모양이다.

시일이 아주 촉박하게 의뢰를 받았기에 아이들 연령에 적합하면서도 강의 주제에 부합하는 점자 동화책을 부랴부랴 검색하여 대출 받았다.

유아들에게는 백 마디 말 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체험이 더 낫기에 반드시 체험을 하고 싶었으나, 연령별 합반으로 진행하게 되어서 클래스 사이즈가 너무 커 교사들에게 짐이 될까 하원 후 가족과 함께 해 볼 수 있도록 체험 미션을 일일이 손으로 적은 쿠키를 140개는 만든 듯 하다.

시일이 촉박해서 강의안을 짜고 나니 라벨지를 사서 프린트할 시간도 없어 할 수 없이 절세명필로 가내 수공업을 하게 된 것이었다. 여하튼 나는 그토록 많은 고뇌를 안고도 작년보다 더 잘 하고 싶은 마음과 내 진심을 듬뿍 담아 최선을 다해 아이 유치원에서 강의를 했다.

어린 아이들의 강의 같은 경우 예기치 못한 여러가지 일들이 벌어지곤 한다.ⓒ은진슬

그러던 어느 날…

그 날은 월요일이었는데, 학습지 하나, 그 흔한 미술, 태권도 학원 하나 다니지 않는 이응이에게 유일한 붙박이 스케줄인 놀이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하원 시간에 맞추어 유치원에 이응이를 데리러 가서 이응이를 만났다.

놀이 수업 장소가 멀어서 부랴부랴 이응이와 서둘러 유치원을 빠져 나가는데, 6세반 아이들이 선생님의 인솔을 받으며 이동하고 있었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마주쳐 지나가는데, 갑자기 내 귀에 이런 소리가 들렸다.

‘우아! 장애인이다!’

아마도 한 아이로부터 시작되었을 그 말은 잔잔한 호수에 돌 하나가 잔물결을 일으키듯이 아이들사이에 파장을 만들어 갔다. 찰나의 순간에 나는 내가 이 상황에서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 할지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아이만 없었더라도 오히려 아이들에게 이야기도 던지고, 웃어 주며 아는 척이라도 해 주었겠으나 그 때는 유아들이 너무 많은 상황과, 아이들이 너무 어리다는 문제 때문에 그럴 수는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는 표정 하나, 멈칫거림 하나 없이 아주 자연스럽고 무신경하게 아이들을 스쳐 지나갔다.

이응이가 그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못 들은 척 하는 것인지는 알 수는 없었으나, 내가 동요가 없었기 때문인지 일단 이응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기에 나는 우선 생각할 시간을 벌며 아이의 반응을 기다리면서 내 입장과 태도를 정리하고 있었다.

아이가 놀이 수업 세션에 들어가고 얼마 후, 원장 수녀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하원 때 기분이 언짢은 일이 있지 않았는지, 이응이는 괜찮은지, 나는 어떤지를 걱정하며 물으시는 전화였다.

나는 솔직히 ‘언짢거나 기분이 나쁜 그런 뉘앙스로 규정할 만한 감정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표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오히려 좀 난감했다.

이응이가 곁에 있었기에 무언가 불편하고, 아이가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혹시나 형아 누나들의 그런 말로 상처를 받지나 않았는지 걱정이 되는 마음은 컸지만, 그 이상은 나에게 그 일이 어떤 감정적 동요를 가져오는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처음 원장 수녀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오히려 내가 무슨 일을 말씀하시는 거냐는 질문을 되돌려 드렸을 정도였으니까.

내게서 되돌아 온 질문에 수녀님께서는, 아까 일을 언급하시며 그런 일이 있은 후에 그 반 담임 선생님이 사색이 되어 원장수녀님께 와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이 사건(?)을 전했다는 것이었다.

‘수녀님! 저는 괜찮아요. 다만, 아이가 맘에 걸리기는 하지만, 솔직히 아이가 아직 반응이 없어서 그 상황을 어떻게 인지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제가 그 상황에 어떤 불편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의연하게 대처했으니 괜찮을 거에요. 그리고 아이들 잘못은 아니니 신경 쓰지 마세요.’

이렇게 말씀 드리니 수녀님은 엄마가 의연하면 아이도 괜찮다고 말씀하시고는 통화를 마무리 했다. 전화를 끊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 당황스러운 일을 겪으신 선생님이 너무 안쓰럽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흔치 않은 사건 앞에서 당황하셨을 선생님을 생각하니 피식 웃음도 났다. 내가 눈이 나빠서 그 선생님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이 조금은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패션모델이자 의족 스프린터인 에이미 멀린스의 강연을 떠올리며, 결국 어른들의 장에인에 대한 불편한 시선이 아이들에게 학습되는 것이란 그녀의 논점에 동감되었다. ⓒ은진슬

갑자기 패션모델이자 의족 스프린터인 에이미 멀린스(Aimee Mullins)의 ‘My 12 pairs of legs’라는 TED 강연이 떠올랐다. 어느날, 그녀는 만 6세에서 8세 아이들 300 명 정도를 모아 놓고 어린이 박물관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연히 테이블 위에는 그녀의 다양한 다리들을 잔뜩 늘어 놓고 있었다. 아이들이란 원래 자신들에게 낯선 것, 모르는 것, 신기한 것에는 자연스러운 호기심을 갖고 온갖 질문, 온갖 행동을 통해 그 호기심을 충족시키려 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수업이 시작되기 전, 로비에 모인 아이들에게 교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희들이 무엇을 하든지, 수업 시간에 선생님 다리는 절대 쳐다봐서는 안 돼.’

아이들이 예의 바르기를 원하는 어른들의 마음은 순수한 아이들의 호기심을 억누른다. 그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그렇게 이야기 한 이유는 그 선생님이 장애인의 불편한 신체 부위를 바라 보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결국 어른들의 장애인에 대한 불편하고 부적절한 시각이 아이들에게도 학습되는 것이라는 게 Mullins의 논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 수업을 진행할 때, 일정 시간 동안 어른들을 모두 클래스에서 배제 시키고 자신과 아이들만 남게 한 뒤 마음껏 의족들을 만져 보고 탐색해 보도록 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아이들은 의족을 만져 보고, 찔러 보며 발가락도 돌려 보는 등… 그야말로 다양한 탐색과 질문들을 자유롭게 쏟아 내며 호기심을 마음껏 충족 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 6세반 담임 선생님도 Mullins가 만났던 선생님과 크게 다르지 않은 태도를 취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장애인을 놀리는 건 나쁜 행동이라고.‘ 하지만, 솔직히 그 상황에서 당황하고 불편했던 건 정작 아이들이 아니라 선생님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그저 길거리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을 보고는 ‘우아, 싸이 아저씨다.’라고 말할 때와 똑같은 동기, 똑같은 기분으로 내게 ‘우아, 장애인이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선생님으로서의 내 존재감이 장애인이라는 존재감 보다는 아이들에게 작게 각인되었다는 것 뿐… 기왕이면 ‘우아! 장애인 선생님이다!’ 정도는 해 주었으면 좋았을텐데…^^

아파트 엘리베이터 같은 곳에서 장애인을 만났을 때, 어린 아이들이 쳐다보거나 그에 대해 물어보면 엄마들은 쳐다보면 안 된다, 그런 거 물어 보는 거 아니다, 조용히 해라, 심지어는 너도 엄마 아빠 말 안 듣고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까지… 그 반응이 참 재미 없다.

우리 어른들도 이런 상황에 마주쳤을 때 자신들의 불편하고 잘못된 사고와 태도를 아이들에게 물려 주기 보다는, 자유롭게 묻고, 탐색할 수 있게 하되 상대방의 기분을 배려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야기하는 법을 중립적인 태도로 가르쳐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놀이 수업이 끝난 후, 어느 정도의 점검과 상황에 따른 아이 마음 읽어주기는 필요했기에, 이응이에게 하원할 때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물었더니, 정색하며 자기는 아무 이야기도 못 들었단다.

그런데, 왜 이 말에 나는 100% 신뢰가 가지 않는 걸까? 일말의 찜찜함이 남는 것이 이응이의 언어 발달 수준이 또래보다는 월등히 앞서 있기 때문에 상황을 인지하고, 판단하여 처리하는 것이 조금은 남다른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단 아이가 그렇다고 하면 그에 대해서 굳이 파고 들어 긁어 부스럼을 만들 때는 아직 아닌 것 같아서 일단은 아이 말을 믿고 더 이상 이야기를 확장 시키지는 않기로 했다.

사실 그간 나와 아이 사이에서 내 장애에 대한 상호 이해와 소통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공을 들여 오픈해 왔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큰 문제 없이 지내 오고 있다. 하지만 이번 일을 겪으면서, 제 3자의 개입으로 인해 생기게 되는 엄마의 장애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에 내 아이의 마음이 다치고 상처 받는 것에 대한 준비와 단련을 시작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 시기를 내년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 보다 빨리 그 시기가 온 것이 조금은 아쉽지만 늘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차근차근 아이와 함께 단련하고 준비해 나간다면 우리 둘 다 큰 동요 없이 이 시기도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응아, 언젠가 네 생각 주머니가 충분히 자라나서 엄마의 글을 이해할 수 있게 될 때쯤이면 이글을 읽게 되겠지? 친구들이 엄마의 눈이 나빠,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너희 엄마 장애인이라고 놀리는 때가 있을 지도 몰라. 하지만, 언젠가 그런 말을 듣더라도 너무 슬퍼하거나 속상해 하지는 않았으면 해. 장애인이라는 말은 나쁜 말이 아니란다.

장애인이라는 말도 외국인, 한국인, 부자, 키다리 등등의 말처럼 그저 한 사람의 신체적, 사회적, 경제적 상태를 나타내는 가치 중립적인 말일 뿐이거든. 다만, 그 말이 부정적으로 들리거나 아프게, 또는 나쁘게 들리는 건, 사람들의 편견과 불편한 마음, 나쁜 마음이 그 말 속에 스며들어 있어서 그런 것뿐이란다.

조금은 아픈 경험이 될지도 모르지만, 엄마의 다름 때문에 겪게 되는 이런 일들을 통해 이응이가 세상의 다름에 너그럽고, 약하고 힘든 사람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베풀 수 있는 멋진 사람이 될 거라고 엄마는 믿는단다.

오늘도 이응이를 통해, 이응이를 위해 엄마는 끊임 없이 배우며 자라날 수 있어 행복하단다.

이응아, 진심으로 사랑하고, 엄마의 아들로 태어나 주어서 정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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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슬 칼럼리스트 세상이 너무 궁금했던 나머지 7개월 만에 급하게 세상 밖으로 나오는 바람에 시각장애와 평생의 불편한(?) 친구 사이가 되었습니다. 언어로 연주하고,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20년 정도 피아노와 뜨거운 사랑을 했지만 첫사랑은 대게 이루어지지 않듯 그 사랑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아 헤매던 끝에 지금은 장애, 음악, 보조공학 등에 관련된 글을 쓰고 번역도 하고 있습니다. 유치원, 학교, 기업체 등에 찾아가 장애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스토리텔러(storyteller) 역할도 하고 있지요. 가끔은 강의의 전달력을 높이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기도 한답니다. 다섯 살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저는 우리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서는 장애와 다름이 좀 더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더 열심히 글을 쓰고, 강의를 하며, 연주도 하고 있습니다. 눈이 나쁜 대신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더 예민하고, 커피와 독서,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다섯살 아이 엄마가 들려 드리는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은 아이 키우는 이야기 한 번 들어 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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