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미술에서 몸을 중심으로 한 담론들이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페미니즘 미술이 주목 받기 시작했던 때와 같을 것이다. 페미니즘, 즉 여성주의는 신체와 정체성의 차이에 따른 사회 정치적인 억압에 맞서 동등한 권리획득과 해방을 주장하며 여성해방운동으로 발전했다.

몸의 담론이 페미니즘과 땔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은 여성과 남성의 차이가 발생하는 시작점이 생물학적인 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근대 이전의 대부분의 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사회적 금기와 억압에 둘러싸여 있었으며 이러한 여성의 몸을 해방하는 것은 여성의 사회적 가치와 정치적 권리, 나아가 궁극적 인권의 실현이었다.

몸에 관한 담론의 역사적 연원을 돌이켜보면 50년대의 식민지 해방, 60년대의 흑인인권운동과 여성해방운동, 80년대의 포스트모더니즘과 탈 중심주의 등이 차례차례 집단의 부분으로서의 몸을 해체시키고 개인의 자아로서의 몸을 발견하도록 했다.

우리가 여기서 주제로 삼고 있는 장애 또한 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장애는 몸으로부터 일어나며 사회에 작용한다.

우리는 앞에서와 같이 몸을 여성과 남성으로 나누는 것처럼 자아를 두 가지로 분리하여 생각하기 쉽다. 즉 몸과 정신이라는 이분법인데 정신을 인간만이 갖는 고유한 측면으로 보는 인본주의적인 규정에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 정신과 몸이 정확히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정신장애와 신체장애를 구분하지 않고 장애를 몸의 담론과 관련 지을 것이다.

사실 미술사에서 인체를 재현하는 전통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다. 이집트와 그리스의 엄격하게 제한된 인체의 이미지는 그 비현실성 때문에 아름다움의 이상이 되었다. 또한 그 이상은 각 시대마다 다르게 나타나는데 르네상스 이후 바로크시대에는 풍만하고 역동적인 몸이 아름다움의 표상이 되었다.

우리는 흔히 유럽에 사는 백인남성에 근거한 인체비례와 정확한 해부학적 관찰을 담고 있는 인체와 그 이미지에 입각해 몸의 아름다움을 규정하는 관념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많은 현대작가들은 이러한 인체표현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고 다양한 몸의 이미지들이 모두 대등한 예술적 대상이 된다고 말한다.

영국작가 마크 퀸(Marc Quinn)의 조각 ‘임신한 앨리슨 래퍼’는 영국의 장애여성화가 앨리슨 래퍼(Alison Lapper)를 모델로 한 작품으로 2005년 영국 트라팔가 광장에 전시되었다. 마크 퀸의 작품에는 장애가 있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의 조각 작품은 흰 대리석으로 되어있어 얼핏 그리스 고전조각들의 깨진 인물상들을 보는 것 같지만 그들은 모두 실재 인물들을 모델로 한 조각 작품이다. 마크 퀸은 작품에서 하나의 미적기준에 맞춘 몸을 거부하고 다양한 몸들이 모두 아름다울 수 있음을 말한다.

우리는 하나의 미적 기준이 되는 몸의 이미지가 그리스와 르네상스시대의 고전작품에만 등장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날마다 그런 이미지에 자신을 맞추곤 한다.

텔레비전 방송과 인터넷을 장식하는 광고들 속에서 몸의 이미지는 정치적인 권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많은 여성들이 그 권력을 동경하며 몸을 학대하는 것이다.

현대 미술가들은 몸을 장소로도 표현하는데 몸은 다분히 정치적인 장소다. 식민지주민의 몸을 억압함으로서 정치적으로 정복되며 권력자의 몸이 크게 표현됨으로서 그의 정치적 힘은 압도적으로 증가한다. 이슬람과 유대교에서 신의 몸은 표현될 수 없는데 우리나라의 의궤와 같은 궁중행사를 그린 그림에도 왕의 형상은 없다. 신이나 왕이 있는 장소가 곧 왕이나 신의 몸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몸이 정치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작동하는 역할을 보여준다.

프랑스작가 오를랑(Orlan)의 작업은 여러 가지 논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체, 얼굴을 장소로 이용한 작업이었다. 그녀는 1990년부터 1993년까지 아홉 번의 성형수술로 얼굴을 변형시키고 그 과정을 생중계했다. 그녀의 얼굴은 여러 고전 미술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부분들로 채워졌다.

그러나 우리의 몸은 연약하다. 진화의 단계에서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신체의 연장인 도구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미디어이론가 마셜맥루언의 말처럼 신체의 연장인 미디어는 우리의 몸을 진화시키고 있다.

인공지능 컴퓨터 알파고 처럼 지치지 않는 뇌를 사용해 늙고 병드는 뇌와 몸을 대체하는 포스트휴먼의 시대가 코앞이다. 인간의 병든 장기는 3D프린터와 줄기세포복제기술이 만들어낸 인공장기로 갱신될 것이고 손상된 팔과 다리도 얼마든지 다시 만들어 낼 것이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장애에서 진정으로 해방될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정치적인 몸의 해방을 맞을 수 있을까.

이는 앞글에서 논했던 장애정체성의 문제와도 맞닿아있다. 즉 장애경험을 전제로 하는 장애정체성은 그것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남아있을 것인가 라는 문제다. 이것은 동시대 예술에서 담론화 되어온 몸의 문제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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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업작가로 활동 중이며 선사랑드로잉회, 뇌성마비작가회 날 등에서 장애인 문화예술행사와 전시기획을 해오고 있다. 칼럼에서는 장애인예술을 현대미술이론들과 동시대 담론들을 통해 조명하고, 역할과 발전 방향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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