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장 일 없는 날 음료수 한 박스 들고 고모 댁에 갔습니다. 아흔 바라보는 고모, 얼마 전에 돌아가신 누나와 친구처럼 지냈는데, 떠나보내고 얼마나 적적하실까 해서 찾아뵙자고 했습니다.

“다음부터는 이런 거 가져오지 마라. 무슨 돈이 있다고.”

“괜찮아요.”

“매형한테는 가 봤나?”

“아뇨.”

“와? 안 갈라고?”

“네. 설에나 갈게요.”

“그래. 설에는 누이한테도 가자.”

“네.”

“이제 누이 없어도 너랑 나랑 이렇게 얼굴 보면 되지.”

“자주 올게요.”

“이렇게 말하니 얼마나 좋누.”

누나 이야기에 아저씨도 고모도 울음을 참았습니다.

“이렇게 왔는데 김치 줄까? 반찬은 있나?”

“있어요. 냅둬요.”

“다음에 김치 없으면 와라. 내 혼자 다 먹지도 못 해.”

“네. 그럴게요.”

작년 10월, 누나가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갔습니다. 복수가 찬 채로 누워있었습니다.

“나 누군지 아요?”

“준덕(가명)이 아이가. 내가 여기 있는지 어찌 알았노.”

“선생이 알려줬어요.”

“여기 왜 와. 뭐가 좋다고. 에고. 막내야. 막내야.”

아저씨는 사람 좋은 얼굴로 누나 손을 잡았습니다.

“이제 가. 이제 안 와도 돼.”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떠나는 누나에게 그래도 몇 마디 건넸고, 아흔 바라보는 누나에게 오십 넘은 동생이, 이제 말할 줄 안다고 몇 마디 건넨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었습니다.

아저씨는 어느 농장에서 품삯도 제대로 못 받고 오십 년 살았습니다. 어찌어찌 가족과 연락이 닿았고 월평빌라에 왔습니다. 월평빌라에 살고 싶다 했습니다. 꼬부랑 할머니 누나와 고모는 그 농장에서 나온 게 고맙고, 다시 시설에서 사는 게 안타까웠는지, 어린 아이 두고 가는 어머니처럼 당부하고 또 당부하며 울었습니다.

반백 년 삶이 농사꾼이었는데 복지시설에 산다고 그날부터 프로그램이다 뭐다 하며 살 수는 없죠. 아저씨와 가족과 의논해서 좋은 농장을 찾고, 몇 군데 거쳐 「덕원농원」에서 6년째 일하고 있습니다. 이삼 년 전부터 준비해서, 드디어 지난여름, 「덕원농원」 주인집 아래채에 전세를 얻었습니다. 시설 바깥에서 자취하는 거죠.

월평빌라에는 시설 밖에서 사는 사람이 네 명 있습니다. 평소 시설 밖에서 자취하고, 여름 더위 겨울 추위 피해서 잠시 시설에 머물거나 방학 때 며칠 놀러 와서 머물고, 명절에 인사하러, 입주자회의 참석 차 옵니다.

실습생 두 명이 아저씨 자취를 도왔습니다. 집 정리하고, 살림 장만하고, 이삿짐 꾸리고, 이사하고, 집들이 준비해서 손님 맞고, 아침저녁 밥 지어 먹는 것 도왔습니다.

이사는 농장주 아들이 트럭 갖고 와서 옮겼습니다. 시설에 사는 아저씨가 자취한다고 시설 마당에 이삿짐을 내놓으니 묘했습니다. 기뻤고요. 그릇 사고, 떡 주문하고, 손님 초대하고, 마을에 떡 돌릴 때 아저씨를 앞세웠습니다. 아저씨 이사이고 아저씨 삶이니까, 아저씨 앞세우고 둘레 사람 앞세워서 해야죠. 잘 도왔습니다.

아, 실습생. 사회복지 전공 대학생 두 명이 왔는데 한 명은 청주 사람이고, 한 명은 고흥 사람입니다. 도시 아가씨와 시골 아가씨. 도시 아가씨는 애교 많고 싹싹합니다. 시골 아가씨는 차분하고 예의 바릅니다.

가끔 아저씨와 밭일을 했습니다. 콩밭에 갔습니다. 한 손에 목장갑 한 손에 호미 들고, 전사처럼 갔습니다.

“아저씨, 어떻게 해야 돼요?”

“콩잎 빼고 풀 뽑으면 돼요.”

“콩잎이 뭐예요?”

“콩잎이 콩잎이지. 이게 콩잎이에요.”

“하나도 모르겠어요.”

아저씨는 능숙하게 콩잎과 잡초를 구분하는데, 도시 아가씨에게는 똑같은 풀이었습니다. 콩잎은 뭐고 풀은 또 뭐야? 남들은 아저씨더러 지적장애인이네 뭐네 해도 훌륭한 농부 대단한 스승이었습니다.

고추밭에 갔습니다.

“아저씨, 어떤 거 따요?”

“이렇게 다 빨간 것만 따면 돼.”

“아, 다 빨간 것만 따면 돼요? 그럼 이거는요? 초록색 조금 있는 거요.”

“그거는 따지 말고 다 빨간 것만 따.”

“아저씨 알려주신 대로 한번 따 볼게요. 나중에 확인해 주세요.

한참은 잘했는데 헷갈리는 걸 만났습니다.

“아저씨, 이거 따요?”

고추 따는 데 집중하느라 보지도 않고, “응, 그래.” 했습니다.

소쿠리에 차면 큰 바구니에 옮기고, 아저씨가 큰 바구니를 정리했습니다.

“에이, 이거는 아직 안 익었네.”

“정말요? 죄송해요. 제가 잘 몰라서 다 따버렸나 봐요.”

“에이, 잘못 땄네. 다음에는 내가 봐야겠네.”

사람들은 아저씨가 말할 줄 아는지 몰랐습니다. 6년 동안 월평빌라 직원들도 제대로 몰랐으니까요. 말문을 연 건 실습 때부터입니다. 6년째 같이 일하는 농장 주인도 이렇게 말하는 걸 처음 봤다고 합니다. 뭘 물으면 30초 뒤에 겨우 ‘그래요.’ 한 마디 듣기 일쑤였거든요. 그나마 기분이 좋을 때, 묻는 사람에 따라서 그랬습니다. ‘네.’ 하고 마는 경우가 많았죠.

실습생 오고 말문을 조금씩 열더니, 어느 날부터는 아저씨가 맞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오죽하면 고모가 ‘이렇게 말하니 얼마나 좋누.’ 했겠습니까. 마을 사람들은 아저씨가 말을 전혀 못 하는 줄 알았고요.

아저씨는 어떻게, 왜, 말문을 열었을까? 궁금했습니다.

농장 주인은, 무슨 일에든 학생들이 아저씨에게 묻고 또 물어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릇 사러 시장에 갔습니다. 아저씨 앞세우고, 학생들 뒤따르고, 그 뒤에 농장주 내외가 따랐습니다. 그릇 하나 사면서 색깔은 어떻고 쓸모는 어떻고 크기는 어떻고 하며 묻고 또 묻는 학생들 보니, 농장주 내외가 답답했답니다. 물어도 대답 않는 사람에게 계속 물으니까요. 당신들이 아는 아저씨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요. 대답 없기는 마찬가진데, 학생들은 답이 있건 없건 묻고 또 묻더랍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저씨가 말문을 열고 찬찬히 말을 하는데, 아주 잘하더랍니다. 학생들에게 크게 배웠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저씨에게 ‘묻고 의논하고 부탁하여’ 자기 삶의 주인이게 한 실습생들의 예와 성이 큰 영향을 끼쳤을 겁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묻고 의논하고 부탁하기’는 월평빌라 직원들도 마찬가지로 잘했습니다. 예와 성을 다해 물었습니다. 그런데도 지난 6년 동안은 왜 말문을 닫았을까? 궁금했습니다.

오십 평생 일했던 농장에서 아저씨는 이거 하라면 이거 하고, 저거 하라면 저거 하며 살았겠죠. 아저씨 살던 곳에 가서 보고 느낀 짐작입니다. 시설에 오니 아저씨에게 이것저것 묻기는 하는데, 직원이라는 사람은 당신에게 큰 사람이었을 겁니다. 뭐든지 다 알고 올바른 판단만 할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겠죠. 새로 일하는 농장에서도 농장주는 큰 사람이었을 거고요. 감히 감 놔라 배 놔라 할 만한 사람들은 아니었겠죠.

그런데 어느 날 자기를 돕겠다고 온 실습생들을 보니, 예를 다해 묻기도 하거니와, 콩잎과 잡초를 구분 못 하지, 덜 익은 고추를 따지, 밥 지어 달라 하지… 돕고 가르쳐야 할 상대, 나서서 도와야 할 상대, 나라도 챙겨야 할 상대를 오십 년 만에 만난 겁니다. 오십 년 만에 아저씨에게 ‘역할’, ‘책임’이라는 게 생긴 겁니다.

식당에 가면 ‘많이 먹어.’ 하며 반찬 그릇 내밀고, 집에 오면 ‘라면 끓여 줄까?’ 하며 끼니 챙기고, 돌아가면 ‘잘 들어갔나?’ 하며 걱정했습니다. 세상에 어떤 지적장애인이 시설 직원에게, 또 누군가에게, 먼저 나서서 ‘많이 먹어라, 라면 끓여 줄까, 잘 들어갔나?’ 할 수 있겠습니까.

실습 막바지에 학생들이 아저씨 부모님 소식을 물었답니다. “벌써 돌아가셨지.” 이게 끝이 아닙니다. 보고 싶은지 여쭸더니, “왜, 보고 싶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부모님 살아 있을 때 잘해.” 천지개벽할 일입니다.

실습 수료식에서 아저씨와 함께한 이야기 나누는데, 먹먹했습니다. 학생들은 끝내 울었고요. 농장주 내외도 많이 놀랐고 많이 배웠다 했습니다. 사회사업 선배라며 실습생에게 가르치려 했는데, 오히려 많이 배우고 크게 깨달았습니다.

“나를 돕겠다는 사람이 전지전능하다면, 그보다 큰 불행이 없겠다. 그는 매사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며, 모르는 것이 없고, 그의 선택은 항상 올바르며 최선인, 그런 전지전능한 사람이 나를 돕겠다 하면 어쩌나.

그 앞에서 나는 한 마디도 할 수 없다. 그는 나에게 선택하고 답하라 하지만, 그의 전지전능 앞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 앞에서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도 주저한다. 이렇게 해 보고 저렇게 해 보라 하는데, 그는 전지전능하여 할 수 있는 것 할 수 있겠다 싶은 것만 골라서 해 보라 하는데, 그마저 못 할까 두렵다. 어떤 때는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할 만한 것마저 그가 한다. 그의 전지전능함으로.

무지무능한 내가 전지전능한 그에게 ‘많이 먹어요. 한창 일할 나이인데 많이 먹어야지요.’ 하는 건 안 된다. 있을 수 없다. ‘부모님 살아 계실 때 잘해요. 돌아가시면, 그때 후회해 봐야 소용없어요.’ 하는 말은, 그도 나도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내가 한번 해 볼게요.’는 안 된다. ‘이거 한번 해 보실래요?’ 하는 것에 충실해야 한다.

나를 돕는 사람이 좀 만만하다면, 그보다 큰 행운이 없겠다. ‘나라도 챙겨야겠다’ 할 만큼 연약하면 좋겠다. 그의 물음이 진짜 물음이고, 나의 답변이 진짜 답변이고, 나의 물음이 진짜 물음이고, 그의 답변이 진짜 답변인지, 아닌지, 나에게 묻고 또 묻는데 나는 안다. 어떤 날은 그의 물음이 가짜 같아 보여도 물어봐 주는 게 고마울 때가 있다.”

말문 연 아저씨와 말문 열게 한 실습생에게 배운 게 큽니다. 약자를 돕는 게 어떠해야 하는지 배웠습니다.

*백준덕 아저씨를 지원했던 월평빌라 김민지 선생과 서지연·조상희 학생의 글과 이야기를 정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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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현 칼럼리스트 ‘월평빌라’에서 일하는 사회사업가.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줄곧 사회복지 현장에 있다. 장애인복지시설 사회사업가가 일하는 이야기, 장애인거주시설 입주 장애인이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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