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에서 필자는 장애인 사회의 예술을 저항이나 치유, 긍정이나 부정 등의 몇 가지 관점만으로 바라볼 수 없음을 이야기 했다. 그것은 동시대 예술의 동시성의 관점에서 장애인 사회의 예술을 실재의 차원으로 옮기는 것이라 했다. 다시 말해 관념과 역사와 학문과 제도의 영역이 장애인 사회의 정체성과 그 예술을 분류하고 정의내리는 것으로는 동시대 장애인 예술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논쟁적으로 비쳐질 것을 무릅쓰고 이야기 한다면 현재까지의 장애인 예술에 관한 논의는 예술계 내부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다. 장애인 예술은 아웃사이더 예술이고 가능성의 예술을 의미하는 에이블 아트였다.

그것은 장애인 예술이 왜 장애인 예술인지 묻는 정체성에 관한 논의가 아니라 장애인 예술이 존재해야하는 혹은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나 근거를 위한 정당성 논의였다. 그것은 사회과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어야할 대상이거나 정책입안자들에 의해 제안되는 명칭 또는 구호였다. 장애인 예술의 미학적 가치를 논할 때에도 언제나 사회 정치적 정당성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이 문제의 복잡성을 좀 더 근본적으로 단순화해서 누가 장애인이고, 왜 장애인인가라는 장애 정체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논의하고자 한다.

여기서 의아해 할 것은 누가 장애인인 것은 확실해 보이는데 왜 장애인인가 라고 묻는 것이 맞는 질문인가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논의된 장애학이나 사회복지학에서 정의하는 장애인 정의에 따르면 장애는 사회 정치적인 산물로서 몸의 차이를 근거로 사회적으로 제한된 상태이며 장애인은 그러한 상태를 정체성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문제는 장애를 사회 정치적인 산물로 봤을 때 몸의 차이를 근거로 하는 사회 정치적인 제한이 완화되거나 사라진다면 장애와 장애인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가이다.

이상주의적인 얘기로 들릴지는 모르겠으나 정치가 지향하는 바는 정확히 그러한 상태다. 몸의 차이를 근거로 권리를 제한하지 않는 상태, 그 몸이 여성이거나 인종이거나 혹은 성정체성이거나 다름을 근거로 하지 않는 상태 말이다.

왜 장애인인가 하는 문제가 여기에 있다. 몸이 다른 자아는 왜 자기를 장애인으로 생각하는 가, 혹은 왜 장애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인 가이다.

이 문제는 가까운 미래에 해결될 가능성이 높은 몸의 기능적 차이로 인한 능력 차이의 해소가 가져올 인간 정체성의 문제와도 맥을 같이한다. (쉬운 예로 헐리우드 영화의 슈퍼 히어로들이 거의 장애인 범주에 속함을 생각해 보라. 향후의 3D 프린터 기술이나 정보통신 기술의 알고리즘, 유전공학에 의한 체세포 복제 기술의 발전 속도를 봤을 때 이러한 기술들이 인간 정체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예상하기 힘들다.)

왜 장애인인가에 관하여 우리는 지금까지의 관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장애를 비정상적인 상태로 파악하여 정상적인 상태로 복구하고자 하는 부정적 장애관념이다. 장애인이 개인의 노력에 의해 그러한 정상성을 회복한다면 그는 더 이상 장애인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 정치적인 의미로도 마찬가지다. 장애인이 사회정치적인 권리나 권력의 획득에 성공한다면 그는 더 이상 장애인이 아니거나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이다.

거기에 따라 우리는 수많은 성공한 장애인들의 예를 들며 사회가 제공해 주지 못한 권리의 획득을 독려해 왔다. 성공한 장애인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사회가 진보하고 있다는 것이고 이러한 사회의 진보는 정치가와 시민사회의 성숙을 의미했다. 이러한 관념은 일부가 사실일 지라도 장애인 사회를 수동적이고 피지배적으로 만드는 이분법적 사고다. 주류와 비주류가 있고 비주류는 항상 주류를 동경하며 주류에 포함되려 노력한다. 이것은 문화적 측면을 설명할 때 더욱 그렇다.

예술계를 말할 때도 우리는 그러한 용어를 쓴다. 주류와 비주류. 예술계도 사회이긴 하나 좀 더 정치적인 사회다. 거기에는 권력과 경제 시스템이 존재하며 전문화되고 획일적인 시장이 존재한다.

시스템과 시장에 적응한 예술가와 작품을 우리는 주류로 분류하며 그렇지 못한 예술가와 작품을 비주류로 분류한다. 지금까지 장애인 예술은 주류를 지향하였으나 주류가 되지는 못했다. 우리는 이것을 사회의 책임이라거나 장애인 자신의 책임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장애인 예술도 주류의 맥락에서 보이길 바래왔다. 그것이 사회통합이며 정치적 성공이라는 식의 논리가 잠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예술가로서 좀 더 예술적으로 말해야겠다.

예술에 있어서 예술적 가치획득의 성공이란 사회적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 예술은 인간이 자신의 가치를 구현하는 영역이기 때문에 가치판단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술적 가치의 구현이 반드시 사회적 가치의 구현은 아니다. 장애인 예술의 가치가 성공적으로 구현된다고 하여 장애인 사회가 주류사회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거나 주류사회에 통합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예술가적 태도는 아닌 것 같다.

필자는 몸과 정신의 다른 조건을 가진 장애인 이며 장애인 예술가다. 그것은 내가 몸과 정신에 대한 다른 가치관과 환경 속에서 예술 작업을 하고 있고 그것이 직접적인 주제가 되지 않더라도 비장애인 예술가와 가치관과 환경이 다르다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속한 장애인 사회의 가치관과 환경도 다르지 않을까? 그것은 예술적으로 유리할 수도 있고 불리할 수도 있지만 내가 왜 장애 예술가인지를 알려주는 것 같다.

앞선 글에서도 말했지만 동시대 예술은 세계화와 지방화가 동시에 일어난다. 한 지역이나 작가의 작품이 자기 지역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주장하면서도 글로벌화 된 미디어와 시장을 통해 재생산되고 소비된다. 그 예로 광주비엔날레와 같은 글로벌화 된 전시회를 꼽을 수 있다. 최근에 개관한 국립 아시아문화전당은 구 전남도청 부지라는 역사적 상징지역의 배경을 바탕으로 글로벌화 된 문화예술 인프라를 구축하여 지방성과 세계화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양상은 장애인 예술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데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장애인 예술은 소수자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하지만 그 내용은 장애와 비 장애를 포함한 보편적 세계예술을 지향하는 것이다.

나는 나의 부모님의 아들이며 친구의 친구이고 선배의 후배이고 후배의 선배이다. 그리고 예술가이며 장애인이고 인간이다. 이 모든 정체성은 내가 왜 나 인지를 알려준다. 장애인 예술의 정체성도 이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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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업작가로 활동 중이며 선사랑드로잉회, 뇌성마비작가회 날 등에서 장애인 문화예술행사와 전시기획을 해오고 있다. 칼럼에서는 장애인예술을 현대미술이론들과 동시대 담론들을 통해 조명하고, 역할과 발전 방향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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