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예술(현대미술이라고도 하는데 역사학에서 현대라는 시간의 기준을 합의하는 것은 어렵지만 대체로 현대는 시간의 일정 기간을 나타내는 것이고 동시대는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지점을 지시하는 것 같다.)의 맥락에서 볼 때 주제나 부제에서 쓰인 단어들의 생명력이 어느 정도 감퇴되어 있거나 진부하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그 단어의 무게감과 뜻하는 것의 넓은 의미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동시대 예술, 즉 우리시대 예술은 이미 1980년대를 전후로 급격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 변화는 동시대를 뜻하는 영어단어 컨템포러리(con-tempo-ary)에서 보듯 모든 것이 함께(con)있는 시간(tempo)에 함께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경험했던 일들과 같다. 우리나라는 1980년대를 과거 군사정권을 계승한 신군부의 정치적 사회적 억압과 함께 출발했다. 반면 기술의 발달과 산업의 고도화는 경제를 성장시키고 소득을 늘렸으며 미래의 새로운 사회에서 평화 번영을 약속하고 있었다.

일찍부터 시작된 경제와 국토의 다양한 개발계획은 간척사업과 댐건설로 지도를 바꾸고 자연을 바꾸었으며 그것에 기대어 살던 많은 것을 바꾸었다. 이러한 변화는 최대 30년에서 최소 10년 사이에 일어난 일로 많은 것이 동시에 일어난 일이다.

길게는 산업혁명 이전과 짧게는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일반적인 역사 서술과 미술사 서술에 있어서 역사는 사건의 인과관계에 따라 나타나는 연속된 시간의 선형적 움직임이었다.

다시 말해 역사는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가는 가느다란 실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인류가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했던 시간의 동시적 폭발을 경험하고 있다. 그것은 교통수단의 발달과 통신수단, 네트워크의 발달과 더불어 개인이 집단에 참여하고 소통하는 것과 개인의 공간에 홀로 존재하는 것이 동시에 일어나는(SNS, 텔레비젼을 예로 들 수 있다.) 전례 없는 경험인 것이다.

이러한 시간과 공간의 동시성 또는 동질성은 인간 개개인을 각각의 주체, 각자의 시간을 따로 갖는 시간의 주관자로 바꿔 놓는다. 이제 인간은 집단의 표상아래 자신을 소속시키지 않고 독립된 주체로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1960년대에서 1970년대 미국에서 일어났던 흑인 민권운동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식민지국가들의 탈식민운동과도 맥을 같이한다. 더불어 더욱 오래된 연원의 페미니즘이 현대미술의 한 축으로 등장한 것도 이 때이다.

우리가 이제 이야기할 장애와 예술에 관한 논점 중 상당부분은 아마도 위와 같은 시간관념의 변화에 따른 선형적 역사관에서의 탈피 또는 해방에 기대고 있다. 우리는 이제 전통과 역사에서 사건의 인과관계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던 배제된 타자(철학에서 타자란 어떤 주된 주체가 바라보는 다른 대상이다. 즉 그것은 상대적인 것이며 여기서 주체는 전통과 역사이고 타자는 장애인 자신이다.)에서 해방되어 억압된 사회의 표상에 저항하는 주체를 생각해 본다.

그 주체는 개인일 수도 있고 소수자의 특성을 공유하는 사회(필자는 여기서 집단보다 사회라고 쓴다. 사회는 집단보다 조직적이고 유기적인 체계아래 자기의 정체성을 확립한 단계다. 계나 계층, 계급도 있을 수 있으나 정치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를 구분 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사회라는 용어는 사회가 주고받는 예술적 효용이라는 측면을 말할 때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필자가 생각하는 장애인 사회는 장애인만으로 구성되는 사회가 아니라 장애인과 장애인을 둘러싼 환경을 구성하는 구성원, 즉 가족, 제도 담당자, 의사, 교사 등을 포함하는 네트워크를 말한다.)일 수도 있다.

이와 같이 거시적 관점에서 이야기할 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실재 현실과 맺는 연관이다. 해방되어 저항해야 할 주체는 피와 살을 가진 나, 즉 자아다. 몸을 가진 주체로서 자아는 사회를 이루는 최소 기본 단위이자 행위의 출발점이다.

몸을 가진 자아에 있어 장애는 극복되거나 받아들여 할 조건이었다. 장애는 개인적이고 의료적인 의미를 띌 때뿐만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로 해석될 때도 몸의 다른 조건이다. 예술은 그 조건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며 치유로서든 저항의 수단으로서든 그 고유의 임무를 특징짓고자 해왔다. 그것이 어떤 가치 판단의 문제를 가지건 현재의 논점은 그렇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이 예술은 단순한 몇 가지의 문맥으로 해석될 수 없다. 그것은 장애인 사회의 예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 장애인 개개인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장애인 사회의 정체성이나 문화에 있어서도 긍정과 부정의 몇 가지 관점만으로 바라볼 수 없는 복합적인 양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양상은 동시대 예술이 바라보는 인간과 인간 현상의 양상과 같다.

이와 같은 양상을 오류의 가능성을 무릅쓰고 여기서 비유적으로 설명한다면 동시대 예술은 수많은 겹눈을 가지고 바라보는 세상과 같다. 다양한 색깔과 형태와 움직임들이 동시에 눈에 비쳐지는 만화경을 상상해 보라. 그러나 실재로 그것은 어떤 환상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실재다.

어쨌든 동시대 예술의 지형도는 동시적이고 균질하다. 사회와 지역의 전통과 문화의 구분이 모호해 지는 것이다. 세계화와 지방화가 동시에 일어난다. 그 가운데서 각각의 사회들은 자기 예술을 세계화 하고 동시에 지방화 하는 것이다.

장애인 사회의 문화와 예술을 논의하는 논점에서 이러한 동시성의 맥락은 장애인 사회의 예술을 실재의 차원으로 옮겨 놓는 것이다. 그것은 저항과 치유의 수단일 수도 있으나 선형적 역사관의 인과관계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행위자로서의 예술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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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업작가로 활동 중이며 선사랑드로잉회, 뇌성마비작가회 날 등에서 장애인 문화예술행사와 전시기획을 해오고 있다. 칼럼에서는 장애인예술을 현대미술이론들과 동시대 담론들을 통해 조명하고, 역할과 발전 방향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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