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오븐을 통해 바라본 우리 나라 유니버설 디자인의 현 주소. ⓒ은진슬

나는 요리 하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글을 쓰다가도, 공부를 하다가도 잘 풀리지 않으면 뜬금없이 쿠키를 굽거나 리코타치즈를 만들기도 한다. 쿠키를 굽거나 치즈를 만들면서 풍겨 오는 그 따뜻하고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들은 스트레스로 날이 선 마음을 다독이며 차분하게 만들어 주는 마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요리를 마치고 나면, 맛있는 음식까지 먹을 수 있다는 건 또 다른 행복이다.

육아를 시작하면서부터 오감으로 소통할 수 있는 요리는 아이와의 시각적 소통에 제한성을 갖고 있는 내게 미술놀이 같은 시각적 놀이에 대한 훌륭한 대체재가 되기에 충분했다. 시각장애 엄마 입장에서 아이와 요리를 하다 보면 맛, 촉감, 냄새 등과 같은 비시각적 감각들을 통한 소통을 많이 할 수 있기 때문에 시각적 감각을 배제할 수 없는 대부분의 놀이에서와 달리 엄마가 좀 더 적극적으로 아이와 소통하고 즐길 수 있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나는 주변 시각장애 엄마들에게도 아이와 함께 요리하기를 자주 권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함께 동고동락한 우리집의 오븐과 오븐으로 만든 맛있는 쿠키. ⓒ은진슬

이번엔 뜬금없는 우리 집 오븐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한다. 이렇게 요리를 좋아하는 나이니, 당연히 결혼 할 때 최신 트렌드의 광파오븐쯤은 장만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상은 의외로 그렇지가 못하다.

당시, 시각장애를 가진 내 마음에 쏙 드는 사용 편의성을 갖춘 오븐을 찾을 수가 없어서, 싱글 시절부터 내가 사용해 오던 미니 컨벡션 오븐을 그냥 데리고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 녀석, 내가 샀을 때부터 별로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 유니버설 디자인에 철저히 위배되는 제품 설계 탓에 시각장애가 있는 나로서는 도저히 제대로 사용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뾰족한 별 다른 대안이 될 만한 제품도 없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요즘 출시되는 스마트오븐들은 대부분이 터치스크린 방식이라 만져도 아무것도 구분할 수가 없으니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예전에 내가 미국에서 사용했던 무지막지하게 투박하고 심플해서 대형 칠면조 로스팅을 해도 자리가 널널한 정통 오븐도, 지금 사용하고 있는 오븐도 다이얼 방식이라 시각장애인이 조작을 하는 데에는 터치스크린보다는 그나마 낫지만, 온도 표시는 비시각장애인 활동보조 이모조차도 잘 볼 수 없을 정도로 작으니 타인의 도움 없이는 시간이나 온도 설정을 전혀 혼자 할 수가 없다.

우스개소리로, 요리를 못하는 게 아니라 오븐을 못 켜서 요리를 못하는 어이없는 사태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가며 적응해서 사용하는 방법은 눈금을 읽을 수 있도록 다이얼에 방향을 가리키는 돌출된 부분을 시계바늘로 삼아 몇 시 방향이면 몇 도 정도라고 적당히 외워서 사용한다거나, 내가 자주 사용하는 온도에 미세한 스티커 같은 것을 붙여 사용하는 것 등등이었다.

하지만 이건 그야말로 베이글이나 냉동피자나 굽는 정도의 궁여지책이지, 온도나 시간 설정에 민감한 베이킹이나 복잡한 요리를 할 때는 그야말로 아이 말대로 ‘삑!’, ‘X’다. 그래서 며칠 전, 아이와 쿠키를 구으면서도 다른 게 어려운 게 아니라, 온도와 시간을 설정하는 게 제일 힘들었다면 누가 믿어 줄까?

최근 시장을 점령하고 있는 스마트 터치 스크린 방식의 가전제품들. 디자인도 예쁘고, 성능도 좋지만 시각장애인이 다루기에는 어렵기만 하다. ⓒ삼성전자

나는 이런 문제에 대해 내가 장애가 있고, 대기업은 사회적 책임이 있으므로, 모든 장애인들이 당신들의 모든 제품에 대한 동등한 접근권을 가질 수 있게 해 달라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을 요구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대부분 이런 이야기에 제대로 귀도 기울여 주지 않을뿐더러, 이렇게 말하면 듣는 대기업들 기분만 상한다. 그리고 아무리 우리의 주장이 논리적으로 맞고, 당위적이어도 이런 식으로 개선 요구를 하면, 사람들은 장애인들이 자기들만을 위해서 돈 좀 더 들여서 뭘 또 따로 해달란다며 피곤한 생떼를 쓴다는 듯한 시선으로 반감을 갖고 바라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더라는 것이 나의 경험적 결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한 합리적 대안은 무엇일까?

그것은 의외로 간단한데, 모든 성능은 최신 사양과 같으면서도 터치스크린 방식 대신 구모델에서 사용하던 버튼 방식의 오븐 모델도 우리 같은 사용자들을 위해 하나쯤은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사실, 요즘 캡슐커피머신도, 정수기도, 냉장고도, 밥솥도, 오븐도 모두 터치스크린방식을 표방하는데, 그 저변에는 사용의 편의성을 고려하는 측면도 있으나, 대부분이 매끈한 디자인을 위해서인 경우가 많다.

따지고 보면, 트렌드라는 이름으로 여기 저기 터치스크린 방식을 차용하여 제품의 가격만 더 올라가고 사용자에게는 큰 실익이 없는 제품 디자인들도 매우 많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불편하니 터치스크린 방식을 다 없애자는 건 아니다. 제발 한 가지 라인업 정도라도 우리 같은 시각장애인들을 위해서 버튼식 디자인을 사용해 달라는 것이다.

현재, 광파오븐 중에 몇 년 전에 나왔던 버튼식 오븐이 아직도 인터넷에서는 판매되고 있지만, 그 오븐을 사자니 최신 기능을 사용하고 싶어 망설여진다. 설령, 최신 기능을 모두 포기한다고 해도 그 오븐이 언제 단종될지 모른다는 점 또한 A/S 문제 때문에 구매를 망설이게 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최신식을 사자니 터치스크린 방식이라 쓸 수가 없을 것 같아 덥석 살 수도 없다.

스마트폰 기능도 추가가 되며 가전제품은 나날이 발전하며 그 종류가 많아지는데, 시각장애인을 위한 제품 하나정돈 남겨주는 센스를 기대해본다. ⓒLG전자

그런데, 오븐 구매를 위한 조사 도중, 서광이 비치는 정보가 발견되었다. 제품 설명을 읽다 보니, 최첨단 스마트오븐이라 와이파이로 전용APP와 연동하면 스마트폰으로도 쉽게 오븐의 기능들을 제어할 수 있다고 하는 게 아닌가? App을 사용하여 자주 하는 요리들의 온도나 시간 조건을 미리 설정해 두면 터치스크린을 눌러 가며 조작할 일도 별로 없을 테니 여간 매력적인 게 아니다.

생각해 보라. 이 기능이 완벽하게 시각장애인의 사용이 가능하게 설계되어 있다면, 그 누구에게 보다도 시각장애인에게 가장 필요한 매력적인 기능인 것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를 꼼꼼히 따져 보고는 너무 너무 오븐을 바꾸고 싶은 마음에 실물을 보기 위해 매장에 가보니, 아이폰용 App은 개발되어 있지 않아 이 기능을 사용할 수 없다는 슬픈 이야기를 들었다.

시각장애인들 사이에서는 공론화 되어 있는 이야기이지만, 안드로이드의 음성 정보 접근성은 아직 제대로 확보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라 내 입장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샘이 되고 말았다. 결국, 이 오븐을 만드는 회사에 이러한 내 사정을 설명하고 아이폰용 App을 만드는 것도 검토해 달라는 의견을 제안하고는 오븐 구매는 이번에도 포기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회사가 안드로이드 휴대폰 제조사이기도 하니 아이폰용 App을 흔쾌히 만들어 줄 것 같지는 않다.

정말 실망이다. 결국 올해도 오븐은 못 바꿀 모양이다.

여하튼, 전술했듯이 이러한 문제에 대한 가장 심플한 해결책은 그냥 한 가지 라인업 정도는 기기의 성능이나 디자인이 업그레이드되더라도 버튼을 달아 주는 것. 이런 센스 있는 회사가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내 장애 때문에 제품의 기능의 30%를 사용할 수 없다고 해서 회사가 나한테 그 물건을 30% 디스카운트해서 파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회사에게도 내게 적어도 30%만큼은 접근 가능한 제품을 제공할 책임은 있는 거 아닌가 싶다.

세상의 그 어떤 소비자도 자신이 사용할 수 없는 제품을 구매하지는 않을 것이며, 만약, 구매 후에 자신의 과실이나 책임이 아닌 이유로 그 제품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당연히 환불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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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슬 칼럼리스트 세상이 너무 궁금했던 나머지 7개월 만에 급하게 세상 밖으로 나오는 바람에 시각장애와 평생의 불편한(?) 친구 사이가 되었습니다. 언어로 연주하고,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20년 정도 피아노와 뜨거운 사랑을 했지만 첫사랑은 대게 이루어지지 않듯 그 사랑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아 헤매던 끝에 지금은 장애, 음악, 보조공학 등에 관련된 글을 쓰고 번역도 하고 있습니다. 유치원, 학교, 기업체 등에 찾아가 장애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스토리텔러(storyteller) 역할도 하고 있지요. 가끔은 강의의 전달력을 높이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기도 한답니다. 다섯 살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저는 우리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서는 장애와 다름이 좀 더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더 열심히 글을 쓰고, 강의를 하며, 연주도 하고 있습니다. 눈이 나쁜 대신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더 예민하고, 커피와 독서,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다섯살 아이 엄마가 들려 드리는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은 아이 키우는 이야기 한 번 들어 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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