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년생으로 태어났던 두 아이가 함께 성인의 문턱에 섰다.

아들이 초등학교를 한 해 늦게 들어가 여동생과 같은 학년으로 나란히 손잡고 다녔던 풍경 몇 장과 함께 어디가 길인지도 모르고 두려움과 막막함으로 앞만 보고 달려왔던 낯선 여행이 이십 년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제 성인의 길이라 적힌 산 중턱의 둔탁한 대문 하나를 삐그덕 열어보니, 뿌연 안개만 자욱하다. 잠시 앉아 쉬어가야겠다.

아들 영빈이는 7살 때 자폐성장애 1급이라는 영구진단을 받고 특수학교에 입학했다. 착석도, 언어적 소통도 거의 되지 않아 검사 자체가 이뤄지지 않았고, 강박증으로 목욕이나 옷 갈아입기를 거부하고, 낯선 장소에 갈 때마다 극심한 울화를 보여 약물을 복용해야 했다. 이미 두 살 때부터 아들의 다름을 짐작하고 치료실을 전전했었기에 장애진단은 그저 의례적인 과정이었다.

특수학교 입학 후 본격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아들은 많은 진전을 보였다. 학부모 참관 수업 때 40분 동안 착석해서 과제 수행하는 것을 보며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기쁜 순간엔 좀 울어도 될 것 같았다. 힘들 때 눈물이 시작되면, 그칠 자신이 없었기에... ... 이후로 아들은 한글과 숫자도 익히고 우수한 작업 기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회성과 언어능력은 턱없이 낮으나, 실험적 호기심이 강해 기계와 전기제품 등을 모두 조작해보고 분해하여 고장 내는 일도 잦았다.

어느 날 일반초등학교에 다니던 딸이, 노란버스를 타고 멀리까지 가는 오빠의 학교가 얼마나 멋진 곳인지 궁금하다 하여 방문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집에 와서는 울먹이면서 말했다.

“엄마, 오빠네 반에는 왜 아픈 친구들 밖에 없어? 우리 집에서 오빠 한 명 키우기도 힘든데, 거기 선생님은 어떻게 여러 명의 장애아이들을 한꺼번에 돌봐? 그리고, 왜 그 학교엔 운동장이 없어? 아이들은 뛰어 놀아야 하는데, 어디서 맘껏 놀 수 있는 거야?”

그리고 자기네 반에는 서른 명의 건강한 아이들이 있으니, 오빠가 전학 오면 친구들 모두 돌아가면서 돌볼 수 있고, 자기가 친구들에게 자폐의 특성을 다 이야기해서 돕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아들은 일반학교로 전학하였다. 물론 쉽지 않았다. 새로운 장소에서 모든 기물들을 다 조작해보려는 호기심 때문에 비상벨을 눌러 대피하는 소동도 나고, 정수기의 온수와 냉수 꼭지를 바꿔 끼워보려다 부러뜨리기도 하고, 복도에서 혼자 웃으며 돌아다니다가 친구들에게 집단몰매를 맞기도 하고, 선생님들에겐 천덕꾸러기로 방치되며 사고의 연속인 나날들이었다. 집에서는 관심을 독차지하던 순진무구한 오빠를 친구들에게 알리고자 의욕이 충만했던 딸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혼란에 힘겨워했다.

그러나 영빈이를 조금 다른 아이로 이해해달라는 내용으로 쓴 엄마의 편지를 학교신문에 싣고, 전교생을 대상으로 본격적인 장애인식교육을 하면서 학생들도 교사들도 적극적인 교육 의지를 보이기 시작했고, 아들은 눈에 띄게 발전하여 학예회 때 학급친구들과 함께 수화 발표를 완벽하게 해내며 환호와 기립박수를 받기도 하였다. 그렇게 끝없이 거칠게 불어 닥쳐 산산이 부수어 버릴 것만 같던 비바람이 그치고 따스한 햇살이 비취는 날에 아들과 딸은 초등학교를 마쳤다.

중학교를 따로 입학한 후 딸은 그제서야 기를 펴고 응원단장도 하고, 가족들이 온통 오빠에게 정신이 뺏겨 있을 때 외로이 상상속의 놀이로 그림만 그리던 것을 재능으로 꽃 피웠다.

딸이 그린 '꿈꾸는 오누이'. 쌍둥이처럼 늘 얼굴을 맞대고 잠들던 모습이다. ⓒ김석주

칼럼의 프로필 사진으로 대신한 그림은 쌍둥이처럼 늘 얼굴을 맞대고 잠들던 모습을, 딸이 수채화로 그려낸 ‘꿈꾸는 오누이’다.

아들은 남녀공학 중학교에서 여자 친구들의 귀여움을 받으며 지냈고, 비장애 학생들과 같이 경쟁하여 로봇조립부문에서 전교 1등을 하고, 부산시 교육청 대회에서는 장려상을 받기도 했다. 고등학교는 전자공업계 학교로 들어가 과학상자 부문 장애학생기능경진대회에 출전도 하며 무사히 3년을 마쳤다. 그러나 여전히 사회성은 다섯 살 수준으로 형과 동생도 구분할 줄 몰라 누구든 시키는 대로 다 따라하며, 발음의 어눌함으로 의사소통에 큰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아직까지 특수교육적 도움이 더 필요하다고 보아서 특수학교 전공과에 지원하였으나 3대 1의 경쟁률로 낙제했으며, 지역 복지관의 주간보호센터와 직업재활장을 여러 군데 알아보았으나 대부분 많은 대기자들로 일정이 막연했다. 그러고 나니 미래에의 의문들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아들의 친구들 70%는 어디로 가게 될까?'

'이전에 성인의 길에 들어선 선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예산이 부족해 체계적 프로그램도 없이 아기처럼 돌봐주기만 하는 주간보호센터에 있을까, 매일 8시간 단순반복노동을 하며 10만원 남짓 받는 월급으로 평생을 이어가고 있을까?'

아들의 장애만 잘 치료하면 되는 줄 알았다. 야생 정글 같은 거친 학교만 잘 견뎌내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희망만을 품고 달려온 20년의 문턱엔 크기도 방향도 알 수 없는 짙은 안개만 자욱하다. 나의 이야기는 이렇게 다시 막막하고 두려운 안개 속 첫걸음으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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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주 칼럼니스트 청년이 된 자폐성장애 아들과 비장애 딸을 둔 엄마이고, 음악치료사이자 부모활동가로서 다양한 유형의 장애인들을 만나고 있다. 현장의 문제와 정책제안, 장애인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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