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이 우주에서 오직 인간만이 유일한 지성체일까?”라는 질문을 한다면, 아마도 대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라고 답할 것이다.

현대인들은 이 우주가 지나칠 정도로 큰 탓에, 오직 지구에만 생명체나 지성체가 있다고 믿는 것이 독단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H.G. 웰스 역시 자신의 소설『우주전쟁』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어 그런 문제제기를 한다. 아주 먼 곳도 아닌 바로 지구의 이웃행성인 화성에서 ‘괴물’ 같은 외계인들이 침공해 와 지구는 패닉에 빠뜨리는 내용이다. 외계인은 너무나 가까운데 있었고, 아무 대비도 없었던 탓에 지구는 무방비 상태로 위기에 처한다.

외계인들, 이방인들, 혹은 타자의 문제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전쟁이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고, 생긴 것도 다르고, 피부색도 다르고, 옷 입는 것도 다른 무리들이 우리의 영역에 들이 닥치게 되는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그때 일어나는 갈등과 혼란은 참혹하곤 하다.

20여 년 전 학부시절, 필자는 한국 대학사회에서 외계인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뇌성마비 장애인이 소위 인서울 대학에 다닌다는 것은 좀 희한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역시나 당시도 타자(他者)에 대한 반응은 어딘가 어색하며, 불편했다. 특히, 여자 강사들이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다. 성적도 당연히 안 좋았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동성애자들을 멀리한다. 종교적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10여 년 전 한동안 동남아 지역에서 체류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전에는 선입견조차 없었다. 만난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 체험을 통해서 다른 것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대학생 시절 그렇게 일부 선생들이 노골적으로 필자에게 반감을 드러내곤 했던 이유였다.

추정컨대, 그들이 살아오는 동안에 보고, 만났던 장애인들의 모습과 관련되리라. 한국사회에서 그들의 눈에 비친 장애인은 추하고, 열등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아침에 장애인을 보면 그날 재수가 없다는 믿음을 가지는 사람들도 많았다.

타자(他者)란 어떤 믿음에 기초한 ‘나 혹은 우리’가 아닌 자들, ‘나 혹은 우리’ 밖의 존재자를 의미한다. 그런 이유로, 타자는 종종 호기심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대게는 두려움과 적대감의 대상이 되곤 한다.

상대가 우리와 다르며, 다르다는 것은 불편하고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사코 타자와 같이 있길 원하지 않는다.

이사야마 하지메의 유명한 만화 『진격의 거인』 역시 아마도 ‘타자’가 불러일으키는 공포를 극적으로 표현한 작품일 것이다.

갑자기 어딘가에서 엄청나게 거대한 거인들이 나타나 해맑은 표정으로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먹는다. 패닉에 빠졌던 사람들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거인보다 더 높은 벽을 쌓고 이내 안심한다. 하지만 잠시 후 더 거대한 거인들이 나타나 벽을 부수고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사람사냥을 하기 시작한다.

이와는 달리, 미국에선 이미 1960년대에 ‘SETI(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계획을 착수, 외계지성체를 찾아내려는 노력을 하기 시작했고, 이어 1970년대에 ‘보이저 계획(Voyager Project)’을 세우고, 태양계의 외행성들은 물론이거니와 더 나아가 태양계 외부를 직접 탐사하는 인공위성들을 띄우기에 이른다.

유년 시절, 필자는 보이저 탐사선들이 해왕성, 명왕성들을 탐사하고 마침내 태양계를 벗어나는 장면을 수없이 상상하곤 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상상은 실현됐다.

타자(他者)의 영역은 늘 미지의 영역으로 다가오지만 영원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세상은 온갖 타자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아무리 거부하고 피하려 해도 결국은 어떤 식으로든 타자를 만나게 된다. 타자와의 만남은 우리에게 숙명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타자에 대해서 적극적일 필요가 있다.

한국사회는 과거 몇 백 년 동안 철저히 폐쇄적이었다. 위로는 압록강과 두만강, 그리고 동/서/남은 바다로 고립된 한반도는 기나긴 은둔의 시간을 보냈다.

이런 업(業) 때문일까, 현재 경제적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개방된 나라들 중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잠재의식’이나 일상에선 과거의 ‘구태’가 여전하다. ‘획일성’, ‘패거리주의’, ‘당파성’, ‘왕따문화’, ‘지역편향주의’, ‘유행병’ 등등.

이렇게 겹겹으로 세워지고, 종으로 횡으로 촘촘히 짜인 벽과 틀은 장애인들에겐 ‘지옥’을 체험하게 한다. 여전히 그 ‘우리의 눈’이라는 기준에 따라 장애인들은 ‘남들’이며, 같이 하지 못할 자들이다. 일종의 히스테리성 결벽증이라고나 할까.

중동에선 감기지만, 한국에선 역병인 ‘메르스(MERS)’가 서서히 잦아들고 있다. 다행스런 일이다. 하지만, 이후에도 당분간은 계속해서 새로운 희귀한 역병들이 한국에 휘몰아칠 것이다.

타자(他者)에 대해서 무조건적으로 마음을 닫고 있는 한, 똑바로 보지 않는 한, 뇌의 한쪽만을 사용하거나 혹은 오직 심장만을 사용하는 한, 외계의 존재자들은 계속해서 지구를 방문한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아직 타자(他者)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인지부조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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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기 칼럼리스트
뇌병변장애인으로 연세대학교에서 서양철학을 전공(철학박사)했으며, 연세대, 항공대, 홍익대, 교통대, 경희사이버대 등에서 강의해왔다. (사)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 이사다. ‘장애’는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며 한국과 한국인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중요한 코드들 중의 하나라고 판단하며, 주로 인문학적 관점에서 ‘장애’를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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