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메르스 공포증에 사로잡혀 있다. 혹자는 ‘메르스 공포증’이라는 필자의 표현에 거부감을 가질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메르스는 비록 우리에겐 낯설지만, 사실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감기 바이러스들 중 하나이며, 과거 신종플루나 사스에 비해서 실질적 위험도 적고, 공기 중 전염율이 희박하며, 지속적인 접촉이 일어나며 극히 밀폐된 공간에 오랫동안 머물게 되는, 병원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만 주로 전염되는 중동산 바이러스다. 유의는 하되, 공포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다수의 한국인들이 그다지 객관적 근거가 없는 메르스 공포증에 빠지자 국제 학계에선 혹시나 메르스 변종이 출현한 것인가 의구심을 가졌었다. 하지만, 그 어떤 변이도 일어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이쯤 되자 “혹시 한국인은 메르스 바이러스에 취약한 것인가?” 하고 의아함을 표현하는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필자의 메르스에 관한 정보는 관련 의학 전문가의 소견에 기초한 것임을 밝힙니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해마다 2천명 이상이 결핵 등의 전염병으로 죽어가고 있으며, 단순 독감으로도 수천 명씩 죽어가며, 심지어 교통사고로도 5천명 이상씩 죽어가는 것이 우리의 일상인데, 왜 유독 메르스에 온 나라가 이렇게 시끄러운 것인가?” 만일 메르스 때문에 병원가기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어느 때도 병원엘 갈 수가 없다. 병원이라는 곳은 늘 다양한 전염병과 전투가 일어나는 최전방 지역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런 공포증에 시달리는 사이 얼마 전 목포에서 장애인 수십명에게 허위채무를 뒤집어 씌어 새우잡이 배에 팔아넘긴 일당이 검거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작년에 신안 염전에서 민, 관, 경이 합세해서 수십년동안 장애인들을 노예처럼 부린 업주들이 검거된 일이 일어났고, 국민적 공분에도 불구하고, 업주들 모두 집행유예로 풀려난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필자는 궁금하다. 왜 우리는 ‘사실’은 기억하지 못하거나 인지하지 못하면서, 거짓과 선동은 잘 받아들이며 그렇게도 쉽게 낚이는 것일까? 근거도 없는 광우병으로 그렇게 나라가 온통 난리법석이었음에도 왜 우리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것일까?

한 가지 재미난 일화가 기억난다. 광우병 굿판이 한창일 때, 필자는 어느 지방 터미널에서 우연히 한 젊은 길손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이러저런 이야기를 하다 ‘라면’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필자는 길손에게 좋아하는 라면이 무엇이냐 물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자신의 개인 신앙에 따르면 ‘돼지고기’를 절대로 섭취하면 안 되고, 그래서 오직 ‘소고기’ 성분이 들어간 라면만 먹는다는 대답을 했다. 국가적 굿판에 대항하는 특정 교파의 교회적 굿판인 것이었다(일반적인 기독교 교리에선 돼지고기 섭취를 금하지 않습니다).살짝 웃음이 났다.

아직도 많은 한국인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생각’이란 ‘잇속차림’이나 ‘변명’, 혹은 ‘당리당략’일 뿐인 것 같다. 그러다보니, 그들은 생각을 하면 할수록 사실에 근접하는 것이 아니라, 허구에 근접하고, 억지를 부리고,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선전선동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 같다. 뭐랄까 마치 사이비종교 세뇌현상 같다고나 할까.

‘생각’이란 합리적이고 냉정하게 어떤 것을 사리에 맞게 따져봄을 말함이다. 그런 이유로, 생각의 주체는 집단이나 남이 아닌 철저히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하며, 그렇게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되어 생각을 한다 함은 결국 자신의 무지나 오류, 혹은 한계에 대한 성찰이나 자각의 과정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과정은 철저히 개인적이다.

사실, 바로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생각하기 싫어한다. 철저히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것을 너무나 싫어한다. 늘 과도하게 외로워하고, 불안해하며, 의지하고 싶어하며, 무언가에 종속되는 것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는 대신, 믿고 싶어하며,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싶어한다.

한국인들 중에는 스스로 냉정하게 판단하고, 결정하며, 그에 대한 결과에 책임을 지려하기 보단 남이 판단한 것을 맹목적으로 믿고 따르며, 동시에 결과에 대해서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자들이 많다. 그래서 결국, 그 누구도 주체가 되지 못하며, 누구도 승자가 되지 못하며, 모든 것은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식으로 그냥 그렇게 흘러가게 된다.

필자가 ‘철학’을 전공하게 된 계기들 중의 하나는 필자의 장애와 그에 따른 고유한 장애체험이었던 것 같다. 다시 말해, 극히 평범한 지성의 소유자였던 필자는 자의식을 갖게 된 이래, 본의 아니게, 일반 사람들이 보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것들을 보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이런 경험 속에서 자연스레 세상이, 진실이라는 것이,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고 바라보는 것과는 다를 수 있음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글을 읽는 모든 장애우들과 가족분들께 권유하고 싶다. 모든 사태를 장애인 자신이 주체가 돼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평소에 늘 더 많이 공부해야 한다고 말이다. 자식이 장애를 가졌을수록, 자신이 장애인일수록 더 많이 공부하고 생각하며 살아야만 한다. 그래야 비로소 ‘장애’로부터 해방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지성이 결여되고, 윤리가 상실된 사회일수록, 그리고 온갖 즉흥적인 감정의 과잉만이 난무할수록, 그래서 개인이 존재하지 않고, 집단과 패거리만 활개 칠수록 장애인들의 상황은 그만큼 더욱 열악해진다. 영혼이 없는 사람들의 눈에 ‘장애’는 더욱 특별하거나 혹은 기괴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애인들은 결코 평범하게 살 수 없는 운명을 가진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 장애인들 중에 진정한 지성인과 예술가가 나올 가능성이 높을 수 있다고 본다. 장애인들은 각자 자신들의 개인적 체험들 속에서 일상적 가치관이나 담론들이 얼마나 기괴하고 허구적인 것들인가를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며, 여기서 자연스레 다른 시각과 참된 판단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가 추측컨대, 장애인복지나 교육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게 되면 놀라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광우병이니, 메르스니, 혹은 여러 다른 악령들의 굿판에 많은 사람들이 생각없이 걸려들고, 그에 따라 각자 자신들의 주체를 상실한 채로 이리저리 사분오열되서 허우적거리면서 시간과 인생을 낭비하는 동안에도 우리 장애인들의 각자마다의 처절한 일상은 그대로이며, 그에 따라 우리들은 더욱 더 냉철한 판단을 해야 하며, 우리의 의식을 성장시켜야 할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어느 순간 우리는 어리석은 자들로부터 해방되며, 우리들 스스로 서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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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기 칼럼리스트
뇌병변장애인으로 연세대학교에서 서양철학을 전공(철학박사)했으며, 연세대, 항공대, 홍익대, 교통대, 경희사이버대 등에서 강의해왔다. (사)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 이사다. ‘장애’는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며 한국과 한국인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중요한 코드들 중의 하나라고 판단하며, 주로 인문학적 관점에서 ‘장애’를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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