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들처럼 멋지게 걷고 친구들과 땀 흘리며 축구도 하고 싶습니다.”

12년 전, 초등학교 3학년 시절의 어느 날. ‘자신의 장래희망 적어보기’라는 글짓기 숙제를 하며 힘주어 적었던 한 문장이다.

안면 근육의 경직, 상대적으로 적은 사회적 접촉 기회로 인해 더러의 경우 실제 나이보다 어리게 보일 수 있다는 뇌병변 장애인의 특성이 뚜렷이 내포된 외모에, 무얼 하든 항상 끝이 2% 부족한 허당 기질이 철철 넘치는 탓에 처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중‧고등학생 아니냐’는 말을 심심찮게 듣긴 하지만 생물학적 나이로는 어느덧 20대 중반의 ‘어른’이 되어 다시 돌아보는 나의 유년 시절은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학년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점점 더 심해지는 또래 친구들의 조롱,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겪게 되는 장애의 고통과 그로인한 세상의 차별에 좋은 기억보다는 나쁜 기억이, 웃음보다는 눈물이 더 많이 스며들었던 나날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탓에 어느덧 기억의 저 편에서 꺼져가는 촛불처럼 가물가물해져버린 유년 시절의 장면들, 그 중에서도 그리 특별하지 않은 하나의 일상이 나의 뇌리 속에 콕 박혀 벌써 12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혀 지지 않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건 바로, 그 때는 단순한 글짓기 숙제를 하던 순간을 넘어 나의 진정한 꿈이자 간절한 희망을 적어 내려갔던 순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뭐가 그리 급하고 궁금했는지 10개월이 아닌 8개월 만에 세상 구경을 하게 된 나는 태어나자마자 엄마 품이 아닌 인큐베이터 속으로 먼저 들어가야 했다.

그런데, 조금 더 기다리지 못하고 나온 것에 대한 벌이라도 받은 것일까? 인큐베이터 속에서 그만 ‘산소호흡 수치조절 오차’라는 의료진의 실수로 인해 신체의 오른쪽 운동신경에 마비가 오면서 나도 모르는 새 1급 뇌병변 장애인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어렸을 때는 이 장애가 약을 먹고 병원에 다니면 나을 수 있는 단순한 병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학교에 입학을 하고 점점 철이 들면서 이 장애는 그저 단순한 질병이 아닌 내가 평생 짊어져야 하는 나의 몫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그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나는 매일매일 원망과 불평만을 잔뜩 늘어놓는 하루를 보내곤 했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나여야만 했냐고, 도대체 내가 무얼 그리 잘못했기에 이렇게 장애인이 되어 하루하루 고통 가운데 살아야 하느냐고 말이다.

무남독녀 외동딸인 탓에 차고도 넘치도록 받을 수 있었던 부모님의 사랑, 다른 집과 비교했을 때 특별히 무얼 못하고 있다는 생각할 수 없었을 정도의 평범한 가정환경까지. 어느 하나 부족한 것 없다고 생각했던 내게 장애는 치명적인 약점이 아닐 수 없었다.

친구들은 무척이나 당연스럽게 다 하는 줄넘기, 고무줄놀이, 땅따먹기 같은 바깥놀이 한 번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고, 학교생활 가운데 누구나 한 번쯤은 꿈꿔보는 반장도 내겐 그저 언감생심(焉敢生心)일 뿐이었으니까.

이로 인해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얼굴엔 점점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했고, 삶 역시 점점 부정적인 암흑 속으로 젖어들기 시작했다.

만약 내게 장애가 없었더라면 그저 코웃음으로 넘겨버렸을 법한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마주하는 수많은 편견과 아픔 속에 그렇게 나는 말 그대로 웅장한 무리들의 한쪽 구석에 치우쳐 있는 ‘쭈구리’가 된 채로 초등시절과 중학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처마 밑 그늘에도 봄은 있다 했던가? 마침내 이런 내게도 변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고등학교 입학 후 무슨 일에 있어서든 ‘네게 있는 장애는 어떠한 문제도 되지 않으며, 네게 있어 어떠한 핑계거리도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던 담임선생님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이미 몇 차례 글들을 통해서도 거듭 밝혔던 바,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만난 나의 담임선생님은 학교생활 가운데 무슨 일을 하든 다른 아이들과 나 사이에 한 치의 차별도 심어두지 않는 분이셨고, 그런 담임선생님 덕에 나 역시 그 전까지와는 달리 하루하루 기쁨 속에 자신감으로 충만한 학교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힌 나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요동치듯 일렁이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담임선생님이 나를 변화시키신 것처럼 나도 누군가를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교과서에 나오는 단어의 뜻조차 제대로 모르던 코흘리개 시절부터 줄곧 해온 내 장애에 대한 원망과 고민에 꼭 들어맞는 열쇠를 비로소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세상을 이루는 일들은 대부분 사람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언젠가부터 내 머릿속 한 켠을 자연스레 차지하고 있는 ‘장애인이 차별 받지 않는 세상, 장애가 장애되지 않는 세상’ 역시 장차 사회의 변화를 이끌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얘기인데, 그 이야기인 즉, 바로 그 자리에 그 누군가가 아닌 ‘내’가 서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에이 씨, 우리나라는 이래서 안 된다니까!”

복지 후진국이라 불리우는 대한민국에 살아가는 한 명의 장애인으로서 곳곳마다 놓여있는 장벽 앞에 우리나라의 열악한 환경과 사회체계를 원망하며 ‘이것이 바로 장애인 차별’이라고 온갖 볼멘소리만을 늘어뜨릴 게 아니라, 되려 장애인이기에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마음. 바로 그것을 통해 1명이든, 100명이든, 1000명이든 원치않는 장애를 가지고 살아갈 후대의 장애인들을 위해, 그들이 살아갈 조금 더 편하고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바로 내가 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그 한 사람이 되어 서 있을 수 있으면 이 얼마나 보람찬 일이겠는가.

이 같은 생각을 하자 갑자기 온 몸에 찌릿한 전율이 일기 시작했다. 마음에 꽉 들어찬 더할나위 없는 기쁨이 나를 휘감아 돌기 시작했다.

처음 이러한 생각을 품었던 때가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이니 어느덧 그로부터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대학에 합격해 사회복지라는 학문에 목표를 두고 공부한 덕에 거의 모든 학기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하다 제법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고,

이론과 함께 쌓은 다양한 방법으로의 현장 경험들은 내게 어린 시절 막연하게 지니고 있던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부조리와 열악함을 조금 더 객관적이고 구체적으로, 체계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지금 이렇게 칼럼을 쓰는 일을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며 앞으로의 더 많은 일들을 위한 점차적인 계획을 세워 나 자신을 발전시켜나가고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있겠는가.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만약 내가 장애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안타깝고도 간절한 마음으로 하루속히 대한민국, 더 나아가 전 세계가 ‘장애가 장애되지 않는 나라’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될 수 있었을까?

만약 내가 장애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보이는 곳이 전부가 아닌 보이지 않는 복지의 사각지대에 더 많은 초점을 두고 저들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함께 아파하는 마음을 갖게 될 수 있었을까?

결국 지나간 시간과 아픔은 무엇으로든, 어떤 모양으로든 가르침을 남기는 것 같다.

여러 가지 일들로 이래저래 분주한 나날을 보내는 가운데 눈 깜짝할 새 5월 15일, 올해 스승의 날이 훌쩍 지나버렸다.

이번 스승의 날에는 부족한 내가 지금의 자리까지 올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애써주신 은사님들께 연락해 인사를 드리며 제자로써의 역할에 충실했으니 이제는 매 순간의 삶 가운데 나만이 밝힐 수 있는 찬란한 빛을 뿜어주며 매 순간의 삶을 통해 가르침을 남기고 배움에 충실한 역할을 다 하고 있는 내 장애와 나 스스로에게 엄지손가락을 한 번 멋지게 추켜세워 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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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나 칼럼리스트
한국성서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다. 평소 글쓰기에 관심이 많고 조예가 깊어 직장생활 중에도 수필, 동화, 시 등 다양한 장르에서의 습작활동을 하고 있으며 2014년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에서 동화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한 바 있다. 칼럼을 통해서는 사회복지학도로써의 다양한 관점, 그 밖에 평소 지니고 있었던 다양한 생각들을 장애인 당사자인 자신의 경험담과 잘 배합하여 누구나 편안히 쉬어갈 수 있는 여담 형식으로 꾸밈없는 우리네 진솔한 삶의 이야기들을 연재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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