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의 철학사에서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플라톤’은 인간이 뭔가를 안다는 것에 관하여 매우 중요한 분석을 수행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안다는 것’의 의미와 관련해서 적어도 네 가지의 서로 상이한 이해와 사용을 가진다고 한다.

우선, 상당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신체와 그 감각에 기초해서 뭔가를 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눈으로 뭔가를 보고, 귀로 뭔가를 듣는다. 그런가하면, 뭔가를 먹었더니 기분이 좋아지고, 잠을 못잔 터에 뭔가를 하려하니 짜증이 난다.

이런 감각적인 것들은 매우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여겨지며,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감각은 언제나 우리를 기만한다. 사막에서 본 신기루는 제아무리 생생해도 그저 환각에 불과하며, 우리는 너무나 자주 환시/환청 등을 겪곤 하며, 기분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동일한 것의 평가가 극과 극으로 바뀌며, 더 나아가 사람마다 감각적 기준은 제각각이다.

다음으로,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은 오직 자신들이 동일한 이해관계나 입장들을 공유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의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곤 한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현실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시골 사람들은 서울 사람들이 깍쟁이라고 생각하며, 반대로 서울 사람들은 시골 사람들을 능청맞다고 생각한다. 그런가하면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축구는 좀 야만적으로 보이지만,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야구는 스포츠가 아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대한민국의 역사는 적어도 과거 500여년 이래 이런 종류의 집단적 견해를 ‘앎’이라고 이해하는 흐름이었다는 것이다. 특정한 이해관계나 혹은 입장에 따라 사람들이 모여 붕당(朋黨)을 이루고, 이렇게 세(勢)를 형성하기가 무섭게, 자신들의 생각과 주장만이 옳고, 다른 생각들과 의견들은 모두 이단(異端)이나 반동(反動)이라 매도,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비가 오면 농부들은 좋아하지만, 장사하는 사람들은 싫어한다. 이때 누가 옳은 것인지, 비가 와야 하는지 오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절대적이고도 객관적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이유로, 모든 종류의 ‘당파적 사고’는 결코 ‘진리’나 ‘지식’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당파성’이란 늘 특정한 ‘그들’에게만 유리한 것일 뿐이다.

세 번째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은 보통 ‘수학(數學)’적인 지식이다. 수학적인 것은 큰 장점이 있는데, 우선 그것은 상황에 따라 가변적이지 않다는 것, 곧 보편적이라는 것이며 또한 그 값이 정확하게 측정될 수 있다는 것, 곧 확정적이라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수학적인 것은 상황과 무관하며, 사람들의 입장과 무관하게 언제나 정확한 이해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수학적인 것, 혹은 논리적인 것에 대한 이해야말로 진정한 지식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 것이며, 이런 이해를 갖지 못한 자들은 결코 교양인이나 지식인이 될 자격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대한민국 사회가 늘 온갖 종류의 ‘썰’, ‘루머’, ‘선전선동’이 난무하며, 그에 따라 사람들이 낚이고 세상이 편안할 날 없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 나라에는 고도의 추상적 사유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턱없이 부족하며, 더 나아가 목소리 크고, 집단적 근성이 강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으로 보인다. 철학자 ‘니체’는 이런 인간들을 ‘개떼’들이라 폄하했다.

그런데, 플라톤에 의하면, 이런 수학적이고 논리적인 지식은 아직 ‘충분하지’ 않다고 한다. 그것이 비록 지식이라 부를 수 있지만, 그것은 치명적인 결점, 곧 ‘무차별성’과 ‘형식성’을 갖기 때문이다. 곧 지나치게 경직되고, 개별적인 것들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플라톤은 참된 지식은 오직 ‘이데아(IDEA)’에 관한 것이라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는 아직도 다양한 논의들이 진행 중이고, 그 논의들을 모두 열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불필요한 것이다. 단지, 여기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참된 지식은 ‘관조(觀照/Contemplation)’에 의해 성취되는 것으로서, 이때 ‘관조’란 사실상 각자 자신의 이해관계, 편견, 무지, 혹은 탐욕, 원망,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정당화’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부단한 자기반성을 수행하는 것, 개인적인 위선, 허영, 무례함에 대해서 회개하는 것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논자가 이번에 플라톤에 대해서 간략하게 논한 것은 한국사회가 왜 그토록 차별적이며, 경직되어 있으며, 구성원들 각자가 서로 소통되지 않으며, 서로 극악할 정도로 적대적이며, 그 어떤 실질적 타협이나 화해가 요원한 것인지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생각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바, 대한민국은 세계적으로 잘 나가는 나라들 중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국민들은 평소에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눈에 보이는 것에 한정된 삶을 살다가도 무슨 계기만 되면, 끼리끼리 뭉쳐서 서로 자신들만 옳고 상대는 무조건 틀렸다고 난리 버거지를 피우곤 한다. 일상에선 맛집, 유행, 성형, 짝짓기에 혈안이다가도 갑자기 완장차고 죽창 들고 달려드는 빨치산들이 되는 것이다,

장애인 차별이, 장애인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장애 당사자들의 영혼 속에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인정하기 싫은 우리들의 우울한 자화상인 듯싶다. 이런 마당에 비장애인들에게, 사회에, 혹은 더 나아가 정부에 ‘차별철폐’를 요구한다는 것은 부조리해 보이기까지 하다.

또한 내적으로 장애인 차별을 비롯한 온갖 비인권적 상황이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는 마당에 이 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으로, 문화대국으로 발전하길 기대한다는 것은 가소로운 바람일 뿐이라 생각한다.

생각하고, 이성적으로 차분하게 헤아리며, 보다 높고 보편적인 것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며, 동시에 늘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의 오류를 시정하는 노력을 경주하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각자 수치스런 피해자 코스프레를 중단하고, 대신 작으나마 타인에게 뭔가를 주려고 노력할 때라야 비로소 지금 우리를 어지럽히고 고통스럽게 하는 여러 문제들이 하나하나 풀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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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기 칼럼리스트
뇌병변장애인으로 연세대학교에서 서양철학을 전공(철학박사)했으며, 연세대, 항공대, 홍익대, 교통대, 경희사이버대 등에서 강의해왔다. (사)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 이사다. ‘장애’는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며 한국과 한국인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중요한 코드들 중의 하나라고 판단하며, 주로 인문학적 관점에서 ‘장애’를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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