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내게 변화를 준 것은 결국 나 자신이었다. 그 보편의 잣대와 기준을 넘어서자는 의지와 노력이 가져다 준 변화였다.

나는 이번 사하라 레이스를 통해 차이는 그냥 차이일 뿐 그게 결코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걸 내 몸으로 체득했다.

내가 달려온 발자국은 사하라의 시간의 지층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지층 위에 선명히 남아 있을 것이다.

이제 남아 있는 10㎞의 구간은 산책 코스 정도일 뿐이다. 의병 제대증을 받아들고 광주 통합병원 정문을 나설 때 내 앞에 펼쳐진 세계는 암흑이었다.

도움 없이 한 발도 내디딜 수 없는 암흑이었다. 그때 물론 상상도 못했지만 설사 상상을 했다하더라도 100m를 달릴 수 있으리라고 자신할 수 있었을까?

5㎞ 단축 마라톤 코스를 완주하고 났을 때, 5㎞를 뛰었으면 10㎞, 20㎞도 달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것은 곧 나 자신을 긍정했을 때만 생길 수 있는 힘이었다.

1997년, 역삼동에서 안마 시술소를 운영할 때였다. 57실 규모의 안마 시술소는 연일 손님이 다 찰 정도로 호황이었다.

돈이 있는 곳에는 음식에 파리가 꼬이듯 불순한 사람들이 돈 냄새를 맡고 모여들었다.

역삼동 일대의 조직 폭력배들이었다. 그들은 내게 안마 시술소의 영업권을 내놓으라고 했다.

거절하는 나를 끝내는 승용차 트렁크에 쑤셔 박듯이 밀어 넣고 어느 야산으로 가서 땅에 묻었다.

온몸이 땅 속에 묻힌 채 머리만 나와 있는 내 목에 칼을 들이대고 영업권을 포기하라고 협박했다.

끝내 협박에 굴하지 않자 나를 묻어둔 채 그들은 가버렸다. 내가 만약 앞을 볼 수 있었다면 그들은 나를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스무 시간 가까이 되어서 그곳을 지나가던 사람의 도움으로 살아났다. 그 때, 나는 그들에게서 그들 자신을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아들 민은 별 말이 없었다. 평소 과묵한 편이기도 하지만 불볕을 등에 지고 험한 사막을 달려온 애비에게 보이는 관심치고는 무심할 정도로 말이 없었다.

“민아, 이번에 아버지 따라와서 고생 많이 했지?”

나는 녀석의 반응을 떠보려고 에둘러서 말했다.

“아버지 때문에 고생했지 자원봉사 일은 즐거웠어요.”

녀석이 내 속셈을 꿰뚫어 보고 있기라도 한 듯 슬쩍 발을 뺐다.

“아버진 네가 있어서 완주를 할 수 있었는데….”

“아버지, 난 첫날부터 아버지가 레이스를 그만 두기를 바랐어요.”

“그래도 이렇게 완주를 했지 않니.”

“아버지가 누구보다 자랑스러워요. 그렇지만 이번 일에 자신이 생겨서 다음엔 더 험한 일에 도전하실 거잖아요? 그게 염려스러워요.”

민의 말은 남과 가족의 차이를 새삼스레 느끼게 해주었다.

밤이 되자 캠프는 축제 분위기로 바뀌었다. 카이로 근교로 이동하기 위해 새벽 두 시에 버스를 탈 때까지 남아 있는 건 들뜬 분위기와 시간뿐이었다.

국적과 문화와 인종이 다른 레이서들끼리 우정을 다질 수 있는 분위기이며 시간이었다.

음악은 인간을 즉각적으로 행복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고 했던가. 음악이 흘러나오자 캠프파이어를 중심으로 둘러서서 모두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사막의 밤하늘에서는 별들이 저마다의 빛깔로 들려주는 빛의 노래가 있었다.

광막한 대지는 깊은 울림으로 별들의 노래에 화답하고 있었다. 사람들에게는 몸짓에서 우러나오는 노래가 있었다.

빛이든, 울림이든, 몸짓이든, 그 모두가 노래였다.

누군가가 내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일으켜 세웠다.<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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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태씨는 군복무중이던 22살 때 수류탄 폭발사고로 두 눈을 실명하고 1급 시각장애인이 됐다. 꾸준히 장애인계에서 활동해왔으며 현재 전북시각장애인도서관장이자 전북 시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세계 4대 극한 마라톤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마라토너이자 '삼 일만 눈을 뜰 수 있다면'이라는 시집을 낸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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