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인간의 감정이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이렇게도 단순해질 수 있단 말인가? 정말로 내 손에 총이 있었다면 분명 쏘고 말았으리라.

창용찬씨와 나는 서로를 부축한 채 일어섰다. 서로에게 몸을 의지하고 걸음을 떼었다. 창용찬씨의 근육으로 다져진 완강한 몸이 쓰러질 것 같은 나를 지탱해 주었다. 바위투성이 주로가 끝나자 다시 구릉이 기다리고 있었다.

“경태, 내게 기대. 언덕이야.”

창용찬씨가 내 오른팔을 자신의 목에 걸치게 해서 손목을 잡고 왼팔로 내 허리를 감싸서 나를 끌고 구릉을 올라갔다.

나는 오는 도중에 다섯 차례나 설사를 하지 않았어도 몸속의 에너지가 모두 고갈되어 버렸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세 발걸음을 뗄 때 나는 고작해야 한 걸음을 뗄 수 있었고 발바닥의 통증을 줄이기 위해 평지를 골라 발을 디딜 때 나는 뾰족한 돌부리도 밟아야 했다.

스틱을 짚어서 체력 소모를 줄이며 레이스를 할 때 나는 발 앞의 장애물을 확인하기에 급급해야만 했다. 이런 내게 남아 있는 건 생명, 그 본능뿐이었다.

“경태, 캠프가 보여.”

아, 저 캠프를 볼 수 있다면. 내 생명이, 온 몸의 세포가 환희로 춤을 추련만.

“힘 내. 길어야 500m야.”

치프봉 거벽에서 로프에 매달려 있을 때, 땅을 밟을 수만 있다면 어떤 난관이라도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자신했었지.

아, 지금 나는 땅을 밟고 있다. 500m, 갈 수 있다. 달려가라면 달려가리라. 바람처럼 질주하리라. 피니시 라인으로 들어서자 먼저 도착한 레이서들이 모두 나와

박수로 나를 환영해 주었다.

내 귀에 들리는 소리는 ‘아버지’ 하고 부르는 아들 민의 목소리뿐이었다. 롱데이 80㎞를 주파한 나의 기록은 25시간 46분 9초였다.<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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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태씨는 군복무중이던 22살 때 수류탄 폭발사고로 두 눈을 실명하고 1급 시각장애인이 됐다. 꾸준히 장애인계에서 활동해왔으며 현재 전북시각장애인도서관장이자 전북 시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세계 4대 극한 마라톤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마라토너이자 '삼 일만 눈을 뜰 수 있다면'이라는 시집을 낸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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