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앞에 쓰러져 있다는 위급한 상황에 대한 긴장이 나를 잡아 당겼다. ⓒkbs 방송 화면 캡쳐

나는 지금의 상황을 최대의 위기라고 정리했다. 그리고 위기에서 벗어 날 방법이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생각의 가지를 없애고 명료한 줄기만 남겨 두었다. 레이스를 해야 하나, 포기를 해야 하나, 두 가지 중에서 하나만 선택하기로 했다.

포기, 간단하다. 포기만 하면 되니까. 그러나 레이스를 계속해야 하는 당위가 여러 가지 있다.

지금까지 준비하고 노력해온 많은 것들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집착, 나의 레이스를 눈여겨보고 있는 사람들의 기대, 그리고 레이스 끝에서 맛볼 수 있는 희열, 이런 것들이 레이스를 계속해야 하는 당위들이다.

그게 레이스를 계속해야 할 당위라면 포기를 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포기와 레이스, 그 둘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포기를 하든 레이스를 계속하든 이유와 당위가 같은 것이기에.

그렇다면 계속 달려야 한다. 동기와 목적의 순수성을 떠나서 달려야 한다. 포기를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달려야 할 당위이기에.

나를 알지 못할 그 무엇이 떠밀고 있다. 앞을 못 보는 장애의 몸으로 많은 도전의 과정에서 축적된 힘일지도 모른다. 내 생명에서 비롯된 가장 원초적인 힘일 것이다.

“인백 씨, 가자고.”

“관장님, 달립시다. 우린 달리러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발걸음을 떼기 위해 짚은 스틱이 제법 큰 돌멩이에 부딪쳤다.

“인백 씨, 돌멩이가 많이 있는 지역인가?”

“예, 연탄만한 돌들이 땅을 덮고 있어요. 내 곁에 바짝 붙어 서세요.”

인백 씨의 배낭을 잡고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돌을 밟은 발바닥이 미끄러지며 몸의 균형이 조금 흐트러졌다. 물집이 잡혀 있는 발바닥에 불같은 통증이 일었다. 나도 모르게 주로 개설자에 대한 증오가 머리끝까지 뻗쳤다. 나흘째인 오늘쯤이면 거의 모든 레이서들의 발바닥에 물집이 생겼을 것을 뻔히 알면서 이런 돌투성이 주로를 잡아놓은 그의 심보가 악마 같았다.

나는 발바닥에서 통증이 뻗칠 때마다 속으로 악마 같은 주로 개설자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나아가는 속도는 더디고 통증은 반비례해서 심해졌다.

극심한 고통 때문에 더위도 느낄 수 없었다. 차라리 기어서 갈 수만 있다면 엉금엉금 기어서 이 구간을 지나고 싶었다. 형극의 길이 바로 이런 상태라는 게 실감되었다. 이글거리는 잉걸불이 깔려 있는 길이라 해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오기가 팽배했다. 인간에 대한 배려가 좁쌀 한 톨만큼도 없는 주로 개설자에 대한 증오에서 생겨난 오기였다. 그 오기가 형극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극기를 키워 주었다.

“관장님, 조금만 가면 끝납니다.”

인백 씨의 목소리가 복음처럼 들리지 않았다. 주로 개설자에 대한 날을 세운 증오가 불러일으킨 투쟁심이 성난 수탉의 목덜미 털처럼 부풀어 있어서였다.

온몸에 끈끈한 진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돌투성이 주로를 벗어났다. 밤톨보다 작은 돌들이 모래에 섞여 있는 주로가 시작되었다. 발바닥의 통증은 여전히 날을 세우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말똥처럼 검은 돌들과 검은 자갈들이 널려 있어요.”

인백 씨가 지형 설명을 해주고는 멈추어 섰다.

“관장님, 저 앞쪽에 누가 쓰러져 있어요.”

발바닥 통증 때문에 주저앉고 싶은 몸이 금세 반응을 했다. 누군가가 쓰러져 있다는 위급한 상황에 대한 긴장이 나를 잡아 당겼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쓰러져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인백 씨가 수건에 물을 적셔서 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물을 줄까요?”

인백 씨의 말에 대답이 없었다. 나는 쓰러져 있는 사람의 상태를 눈으로 볼 수 없어서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었다. 마음만 답답할 뿐이었다.

“더위 때문에 탈진한 것 같아요.”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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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태씨는 군복무중이던 22살 때 수류탄 폭발사고로 두 눈을 실명하고 1급 시각장애인이 됐다. 꾸준히 장애인계에서 활동해왔으며 현재 전북시각장애인도서관장이자 전북 시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세계 4대 극한 마라톤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마라토너이자 '삼 일만 눈을 뜰 수 있다면'이라는 시집을 낸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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