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은 어차피 허상인 신기루조차도 볼 수 없단 말인지, 새삼스레 장애에 대한 비애에 빠졌다. ⓒkbs 방송 캡처

“인백 씨, 왜 시각장애인은 신기루를 볼 수가 없을까?”

“시각장애인은 신기루를 볼 수 없대요? 누가 그래요?”

나는 인백씨의 말에 흠칫 놀랐다. 허긴 신기루를 똑같은 위치에서 못 보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지금 인백 씨의 말은 시각장애인이 신기루를 보지 못한다는 데 대한 반박의 의미가 담겨 있다.

“아까 인백 씨는 오래된 성채가 있는 오아시스를 봤는데 나는 못 봐서….”

“에이 관장님도, 그러니까 신기루죠. 그런 거 안 보고 사는 게 훨씬 편해요. 내 인생은 신기루 때문에 망쳤어요. 관장님 마음 속에 있는 확실한 오아시스만 보고 살아가세요.”

애당초 내가 하고자 했던 말의 본질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인백 씨의 말에는 의미있는 결론이 담겨 있었다.

체크 포인트를 출발해서 2㎞쯤 달리자 왼쪽 종아리에서 진물이 흘러내렸다. 첫날 입은 화상이 기어이 덧을 내고 말았다. 잔혹한 태양열과 가혹한 복사열 때문에 생긴 화상 부위의 물집들이 터져서 흐르는 진물이었다. 물집들이 터진 종아리 살갗이 지저분했다. 주로에 주저앉아 종아리의 화상 부위에 알코올젤을 바르고 있을 때 의료진을 태운 지프가 앞에 와서 멎었다.

“화상이 심한데 차에 탈텐가?”

그 말은 레이서를 포기하라는 의미였다.

“노우!”

내가 들어도 흠칫 놀랄 정도로 목소리가 컸다. 첫날 체크 포인트에서 의료진에게 시달린 걸 생각하면 야릇한 적개심마저 생겼다. 그 때는 체크 포인트에서 휴식을 할 때였지만 지금은 레이스 도중이 아닌가. 집요한 의료진에게 잘못 걸리면 두세 시간은 붙잡혀 있어야 한다. 혈압과 맥박 체크, 소변검사와 문진상담을 30분마다 몇 차례 반복해서 받아야 한다.

첫날, 장비검사를 마친 후 레이스 도중에 일어나는 어떤 질병이나 사고, 또는 목숨을 잃는 경우가 발생해도 주최 측에서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서약서에 사인을 했지만 레이서들의 몸 상태를 체크하는 의료진은 단호했다.

사하라 레이스의 프로그램은 자본주의의 합리성과 비정함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주최측인 ‘레이싱 더 플래닛’ 은 레이서들로부터 참가비를 다 받았으니 포기를 하든 완주를 하든 신경 쓸 일이 아니다. 6박7일 동안 먹을 식량까지도 참가자들이 짊어지고 왔으니 포기를 하든 완주를 하든 조금도 영향이 없다.

그러나 주최 측에서 고용한 의료진의 입장은 다르다. 그들은 인도주의 입장에서 레이서들의 상태를 면밀히 체크해 레이스를 중단 시킬 수 있는 권한까지 있다.

사실 의료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 레이스 자체가 비인도적인데다 레이서들의 건강을 해칠 요인이 충분히 있다. 그런 모순을 안고 시작된 레이스에서 의료진이 절대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 또한 모순일 수밖에 없다.

미국인 의사인 테일러가 내게 심문하듯 말했다.

“어느 나라에서 왔나?”

“코리아.”

“코리아라는 나라가 있나?”

“지구에서 최대 규모인 올림픽과 월드컵까지 개최한 코리아를

모르다니 당신은 정보화 시대에 낙오된 사람이 아닌가?”

볼 수는 없었지만 테일러는 모멸을 당했다는 생각 때문에 얼굴빛이 달라지고 있으리라.

“이름은?”

내가 짐작했던 것과는 달리 어조가 부드러웠다.

“송경태.”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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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태씨는 군복무중이던 22살 때 수류탄 폭발사고로 두 눈을 실명하고 1급 시각장애인이 됐다. 꾸준히 장애인계에서 활동해왔으며 현재 전북시각장애인도서관장이자 전북 시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세계 4대 극한 마라톤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마라토너이자 '삼 일만 눈을 뜰 수 있다면'이라는 시집을 낸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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