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백 씨가 성채가 있는 오아시스 신기루를 보았다. ⓒkbs 방송 캡처

함께 달리는 인백 씨는 이러한 나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을 내게 주어진 현실이라고 수용하고 나면 오 히려 속이 편하다.

실명 이후 가장 힘들었던 분기점이 볼 수 없는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직전이었다. 눈으로 볼 수 없다는 걸 내 현실로 받아들이고 나서부터 마음의 눈이 조금씩 뜨이기 시작했다. 내가 서 있는 곳의 풍경을 마음으로 보기 시작했다. 시신경을 통해서 보는 풍경은 고정되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마음으로 보는 풍경은 내가 채색을 하고 사물들을 아름답게 배치 한다.

“좀 쉬었다 가지요.”

인백 씨의 목소리에 출발 이후 달려온 거리에 대한 만족감이 배어 있었다. 땀이 배기 시작한 옷이 서걱거렸다. 물과 함께 양갱을 먹었다. 양갱이 지닌 열량과 위를 채워주는 적당한 포만감이 휴식의 기분을 상승시켜 주었다.

다시 주로에 섰다. 햇살이 따갑게 꽂혔다. 메마른 땅은 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육체의 동력에 시동을 걸었다. 몸의 기관들이 활발하게 활동을 시작했다. 30분 정도 달리자 지긋지긋한 모래구릉 지대가 시작되었다.

“모래 언덕 지대를 벗어나려면 한 시간 정도 걸릴 것 같네요. 이 지역을 벗어나면 바로 체크 포인트가 있을 것 같아요.”

첫 번째 모래구릉 위에 올라서자 인백 씨가 적진의 상황을 설명하듯 내게 말했다. 한 시간 동안 모래 입자들과 벌일 싸움을 생각하니 진저리가 쳐졌다. 그러나 어쩌랴. 유황불이 타오르는 연옥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통과해야 하거늘.

모래구릉 지대로 들어서니 좋은 점도 있었다. 푹신한 모래의 감촉 때문에 발바닥의 통증을 별로 느낄 수 없었다. 잃은 게 있으면 얻는 게 있고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다는 인생살이 법칙이 이 사막에서도 적용되었다.

모래구릉을 넘는 것은 체력이 아니라 의지였다. 모래에 빠진 발목을 빼는 데는 반복되는 행동의 관성에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라 ‘이 모래밭에서 발을 빼지 못하면 죽어. 그러니까 어서 발을 빼’라는 생명의 명령을 수행하는 의지였다.

“이제 마지막 모래 언덕입니다. 어! 저기 오아시스가 있어요. 대추야자 나무가 울창하고 오래된 성채가 보이네요. 성채에는 높은 망루도 있어요.”

이 사막에 오아시스가 있는 거야 당연하지만 오래된 성채가 있다니. 혹시 로마군대가 이곳 아프리카에 진주했을 때 쌓은 성채인지도 모른다. 아, 그 성채만은 꼭 보고 싶다. 이 사막에 축성해 놓은 성채에서 고대 로마인들의 자취를 확인하고 싶다.

“인백 씨 오아시스 하고 성채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어?”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 같아요. 1㎞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것 같아요.”

모래구릉을 내려가 커다란 바위들이 서 있는 지역으로 들어서서 조금 가자 체크 포인트가 있었다. 내 마음은 체크 포인트를 빨리 지나쳐서 성채가 있다는 오아시스에 가고 싶은 일념뿐이었다.

“가까운 위치에 오래된 성곽이 있는 오아시스가 있나요?”

인백 씨가 체크 포인트의 자원 봉사자에게 물었다.

“하하, 신기루를 본 모양이군요. 모래구릉 위에서 오아시스를 봤다는 레이서가 몇 사람 있어요. 그런데 오래된 성곽을 보았다는 사람은 처음이에요.”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성곽이 있으나 없으나 어차피 신기루인데 그게 뭐 대수냐 하는 허망한 심정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시각장애인은 신기루를 볼 수 없을까? 실재하지도 않은 어떤 상(像)인 신기루를 왜 시각장애인은 볼 수 없단 말인가? 시각장애인은 환상, 꿈마저도 차단당해야 하나?

체크 포인트를 출발해서 한 시간 가까이 가는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신기루마저도 볼 수 없다는 장애에 대한 비애가 새삼스레 마음을 무겁게 했다. 두 눈을 잃은 지 23년, 이제 이곳 사하라에까지 와서 새삼스레 장애에 대한 비애에 빠지다니. 하지만 환상(幻想)마저도 볼 수 없다는 건 육체의 장애를 넘어서 정신의 장애일지도 모른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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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태씨는 군복무중이던 22살 때 수류탄 폭발사고로 두 눈을 실명하고 1급 시각장애인이 됐다. 꾸준히 장애인계에서 활동해왔으며 현재 전북시각장애인도서관장이자 전북 시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세계 4대 극한 마라톤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마라토너이자 '삼 일만 눈을 뜰 수 있다면'이라는 시집을 낸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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