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프에 도착해 발의 상처들을 살펴보고 있다. ⓒkbs 방송 캡처

사막의 고유한 속성은 증발이다. 수분, 생명, 강, 호수, 왕국까지도 사막에서는 증발한다. 사막의 역사까지도 증발한다. 나는 이 미증유의 증발의 대지에 서서 한 방울의 물방울 같은 내 존재에 대해 새로운 경이를 느꼈다. 한 방울의 물처럼 곧 증발해버린다 해도 새로운 삶을 시작한 이후의 궤적은 내 존재에 대해 경이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오늘이 며칠째인지 몽롱하다. 일주일, 열흘, 아니 그보다 더 오래인 것 같기도 하고 지금 막 첫 출발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꽈리처럼 맺힌 다섯 개의 물집을 터뜨린 발바닥이 쓰리고 화끈거린다. 거기다 왼쪽 새끼발톱이 네 번째 발가락을 파고드는 바람에 발톱을 뽑아버렸다. 새끼발톱을 뽑은 자리를 붕대로 감싸긴 했지만 발을 디딜 때마다 예민하게 반응을 해서 신경이 쓰였다.

오늘 주파할 거리는 32.1㎞, 어제보다 10㎞나 짧다. 주최 측에서 레이서들의 피로도를 감안해서 배려를 해주었다는 생각보다는 코스의 난이도가 얼마나 높기에 주파할 거리를 짧게 잡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먼저 들었다.

새벽 6시, 사막의 지평에서 여명이 밝아올 무렵 출발을 했다. 새벽까지 세차게 불던 모래 폭풍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것 같다. 바람에 실려 온 모래입자가 얼굴에 따갑게 꽂힌다.

오늘 주파할 코스의 난이도가 아무리 높아도 별로 두렵지 않다. 지난 이틀 동안 고갈된 체력과 물집을 터뜨린 발바닥, 그리고 왼쪽 새끼발가락 발톱까지 뽑은 걸 감안하면 몸도 마음도 위축되어야 마땅한데도 오히려 자신감이 앞섰다. 그 자신감의 바탕에는 아들 민이가 있었다.

어제 캠프에 도착해서 발바닥의 물집과 새끼발가락 발톱 처치만 하고 곧바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캠프에 도착했다는 안도와 해일처럼 밀려오는 피로 때문에 내 몸을 어떻게 통제할 수 없었다. 혼곤한 잠의 바다 속으로 깊이 가라앉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 아버지!”

그 깊은 잠의 바다 속에서 아들 민이가 부르는 소리에 깨어났다.

“네가 웬일이냐?”

“아버지, 컵라면 끓여 왔는데 드시고 주무세요.”

컵라면을 들고 앞에 있는 아들 민이를 보는 순간 뜨거운 덩어리가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바라보고만 있자 민이가 나직이 말했다.

“아버지, 아무 것도 안 드시고 그냥 주무셨잖아요. 워낙 피곤하신 것 같아서 그냥 있었어요.”

“그래, 지금 몇 시냐?”

“열한 시예요. 아버지 몸은 어떠세요?”

“응, 괜찮아. 걱정하지 마라. 앞으로 열흘은 더 달릴 수 있다.”

나는 아들 민이 앞에서 허세를 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들이 지켜보고 있는 한 열흘이 아니라 한 달이라도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핏줄을 통해서 교감할 수 있는 힘이었다.

선두 그룹은 해 뜨기 전에 최대한 주파 거리를 늘리려고 속도를 빨리해서 치고 나갔다. 어제까지 선두 그룹 세 사람 중에 우리 팀 안병식씨가 있다고 했다. 오늘도 안병식씨가 최선두 그룹에 섞여 나갔다고 했다. 나는 꼴찌만이 누릴 수 있는 여유를 생각하며 레이스를 했다.

지면이 무척 딱딱했다. 발목이 빠지는 모래구릉 지대와 비교하면 달리기가 한결 수월했다. 아들 민이가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어서 그런지 내딛는 발걸음이 가볍다. 나 혼자 달리는 게 아니라 민이와 함께 달리고 있다는 든든함 때문이리라.

나를 모험 세계로 내몰고 있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도전이다.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경험의 가능성을 찾아서 길을 떠난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이런 내 모습이 이상하게 비치리라.

내게 중요한 것은 사막이 아니다. 사막을 꼭 달려야 하는 절대적인 이유는 없다. 다만 사막은 내 경험의 지평을 열어주는 공간일 뿐이다. 내게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연에게 묻는 것이 아니고 나 자신에 대해 묻는 것이다.

자연이 내게 주는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느냐고 나에게 묻는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결론을 얻는 것이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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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태씨는 군복무중이던 22살 때 수류탄 폭발사고로 두 눈을 실명하고 1급 시각장애인이 됐다. 꾸준히 장애인계에서 활동해왔으며 현재 전북시각장애인도서관장이자 전북 시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세계 4대 극한 마라톤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마라토너이자 '삼 일만 눈을 뜰 수 있다면'이라는 시집을 낸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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