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본 칼럼 연재를 시작하며 거주시설과 군대를 비교했다. 군대는 나라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군인들을 통재하고 거주시설은 가족과 사회가 장애인을 돌볼 수 없을 때 대신 보살펴준다는 명분으로 시설 입소자를 통제 한다고 했다.

통제 속엔 ‘규율’이 존재한다. 이는 비단 시설과 군대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그의 책 <감시와 처벌>에서 이렇게 말했다. “권력은 규율을 통해 행사하며, 규율은 전략적으로 육체를 길들일 수 있다.”

이 말을 빌리자면 사회가 규율로 내면화시켜 구성원을 통제하고 있다고 해석해도 무방하다.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규칙이나 규범을 학교를 통해 습득하고 내면화시킨다. 그렇다면 거주시설은 왜 문제이고, 탈 시설은 왜 힘들까?

자립생활 패러다임이 알려지기 이전에 사회는 장애인들이 시설이나 가족이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는 존재 즉, 살 수 없는 존재로 인식했기 때문에 늘 돌봐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봤다.

그래서 장애인들은 항상 누군가에게 의존해 자신보다는 가족이 먼저 또는 자신보다는 시설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이런 의식은 오랫동안 내면화되어 온 자립생활 패러다임이 한국에 들어온 지 1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뿌리 깊게 박혀있다.

시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어 폭력을 정당화하고, 통제를 정당화한다. 또한 입소자들은 정보 접근권에서 제한돼 철저히 시설만 바라보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시설은 입소자의 모든 권리를 쥐고 있는 셈이다.

탈 시설을 결정한다는 건 시설 입소자에게 큰 용기가 필요하다. 오랫동안 내면화되어 있던 시설의 규율을 버리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자신만의 규율과 통제력을 갖추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다.

탈 시설이란 큰 결심에 도움이 되어 줄만한 자립생활센터도 시설에 접근이 어려워 사실상 입소자 스스로 탈 시설에 관한 정보를 얻거나 구해야 하며, 이것 역시 입소자의 강화된 역량을 필요로 한다. 이런 상황에서 입소자에게 무작정 탈 시설을 하라고 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다.

자립생활 패러다임 이후 자립생활센터가 많이 늘어나고 자립생활 진영은 거주시설을 악(惡)으로 규정하고 탈 시설해야 한다며 시설을 배척해왔다.

거주시설이 악인건 분명하다. 또 오늘날 자립을 준비하기 위한 정책도 나름 잘 되어 있다. 하지만 정작 시설을 빠져나오기란 쉽지 않다. 이 지점을 고민해야만 탈 시설이라는 구호가 시설 입소자에게 피부로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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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두선 칼럼리스트
1988년 서울올림픽이 개최되던 해에 태어나 13세 때부터 7년간 산 넘고 물 건너 외진 입지의 시설에서 살아왔다. 각기 다른 시설에 3번 입소, 2번의 수술 등 우여곡절 끌에 탈 시설해 이젠 자립을 꿈꾸고 있다. 7년 간 보아왔던 시설의 모습과 문제점을 살펴보고, 산 넘고 물 건너 지역 사회로 나가기 위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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