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도시 인천으로 발길이 향한다. 인천 근대역사가 동인천역에서 인천역까지 몰려 있다. 동인천역을 등지고 오른쪽으로 50미터쯤 가면 굴다리가 나온다. 굴다리를 지나야 하는 이유는 동인천역 근처엔 횡단보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굴다리 횡단보도를 건너면 화평동 냉면골목이 눈에 들어온다. 아직 찬 기운이 남아있어 그런지 냉면 골목은 점심때인데도 한가롭다. 골목안 냉면집은 원조를 자초하는 간판들만이 손님을 기다린다. 서로 원조라는 간판은 어느 집이 진짜 원조인지 종잡을 수 없게 한다. 하지만 휠체어를 이용하는 내겐 휠체어가 접근할 수 있는 곳이 원조냉면집이다.

동절기라서 만두와 칼국수도 함께 먹을 수 있고, 냉면은 세숫대야만큼 큰 그릇에 가득 담아 나온다. 아직 냉면을 먹기엔 이른 것 같아 골목을 한 바퀴 휙 둘러보고 신포시장으로 발길을 이어간다.

보도를 따라 1키로 남짓, 휠체어로 걷다보면 신포국제시장과 신포문화의 거리가 나란히 붙어 있다. 이 길에서는 팔십년대에서 시간이 멈춰 있는 것 같다.

부지런히 걸어 신포시장에 도착했다. 시장입구에 들어서니 닭강정집 몇 곳에 손님들이 줄지어 차례를 기다린다. 이 곳 역에 간판마다 원조라고 쓰여 있다. 내게 원조는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니 고민할 필요도 없다.

배가 고파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분식집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순댓국, 호박죽, 팥죽, 만두, 찐빵을 시켰다. 맛도 좋지만 가격도 착하다. 어느 정도 배를 채우나니 그 때부터 닭강정이 생각났다.

바로 옆집에서 닭강정을 사가지고 와 먹어보니 여느 닭강정과는 맛에서 차이가 확연하다. 매콤 달콤한 맛이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럽고 간간하다. 한번 먹으니 자꾸 멈출 수 없어 배가 부른데도 먹고 또 먹고 싶어진다. 닭강정을 먹으며 식당 밖을 보니 중국에서 온 신포국제시장엔 관광객이 줄지어 닭강정을 기다린다.

19세기 말 신포동에 있던 푸성귀전이 국제신포시장의 전신이다. 이 곳은 최초 인천의 근대적 상설시장이면서 개항의 역사와 함께 한 백년이 넘는 인천 대표 시장이다. 처음 난전이 생겼을 당시 중국인들이 20십여 곳의 채소가게로 시작했다.

고객은 주로 일본인들이었고 당시 중국 산둥성에서 채소 씨앗을 가져와 근처 동화동과 숭의동 일대에 농사를 지어서 내다 판 곳이 신포시장이다.

인천항이 개항하면서 중국인들이 몰려들어 이 곳이 인천은 물론 우리 나라에서 중국 화농의 시초라고 한다.

지금도 중국관광객이 인천항을 통해 많이 들어오니 그 역사가 백년이 넘었다. 지금 신포시장에서 중국과 일본인 관광객이 줄서서 닭강정을 먹는 모습을 보니 세월의 변천사가 느껴진다. 백 년 전 중국인은 채소를 팔았고, 지금은 관광객으로 찾아와 닭강정을 먹는다. 일본인은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손님으로 시장을 찾으니 세월따라 사는 모습도 많이 변하는 추억의 시장이다.

신포시장엔 닭강정 말고도 먹거리나 볼거리가 많다. 먹거리 중에 쫄면은 신포시장이 시초이고 고향이다. 쫄면은 이 곳에서부터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면서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학창시절 쫄면을 먹기 위해 시내 쫄면집을 찾았다. 당시 쫄면집의 명성은 인근에 자자했고, 학생은 물론 직장인과 인근 주민까지 쫄면을 먹기 위해 줄서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곳의 메뉴는 쫄면과 냉면 딱 두 가지 뿐 이었지만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잘나가는 메뉴였고, 둘 중 어떤 것을 먹을지 행복한 고민 끝의 승자는 항상 쫄면이었다.

쫄면은 인천 중구 경동의 '광신제면'에서 냉면을 만들다가 우연히 불거져 나온 한 가닥의 굵은 면 가락이 쫄면의 시작이고 원조가 되었다고 한다. 보통 냉면 면발은 가늘고 길지만 면을 뽑는 기계 구멍을 잘 못써서 쫄면같이 굵은 면이 나오게 된 것이다.

공장 사장은 순간 이것을 면으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싶어서 공장 앞의 분식점에서 판매를 하게 된 것이다. '쫄면'이라는 이름은 70년대 초 중구 인현동의 분식점 '맛나당'에서 주방장으로 일했던 노승희 씨가 면이 쫄깃쫄깃하다고 해서 '쫄면'이라고 처음 이름 붙였다고 한다.

분식점 주인은 면을 고추장 양념으로 비벼 팔았는데 그 맛이 일품이어서 금세 입소문을 탔다. 냉면 만드는 과정에서 생긴 불량면이 인기를 끄는 음식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쫄면은 매우면서고 깔끔한 맛을 즐기는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국으로 급속히 퍼져 오늘에 이른다.

시장 골목길 쉼터 한편엔 예전 푸성귀 시장의 모습을 조형물로 만들어 놓았다. 조형물에서 어시장과 닭전으로 불리던 한 때를 느낄 수 있고, 생선가게나 횟집은 아직도 많다.

조형물에선 백 년 전의 중국인과 일본인을 만날 수 있다. 중국인은 서양채소인 양파, 양배추, 토마토, 피망, 시금치, 우엉, 부추를 난전에 펼쳐놓고 시장을 찾은 일본여성에게 팔고 있다.

낯선 채소는 일본인과 서양인들에겐 잘 팔리는 푸성귀였다. 그 옆에 한복을 입고 댕기머리 아들을 데리고 나온 조선의 아낙에겐 낯선 모양과 낯선 이름의 채소들이 그저 신기한, 눈길을 끌기에 충분한 채소였다.

이 골목은 수선골목으로도 유명하다. 상점마다 수선의 역사를 보여주듯 허름하지만 작은 평수에 재봉틀 몇 대를 놓고 어떤 옷이든 손님이 원하는대로 변신한다.

수선골목 끝 빨간 등대는 신포시장의 대표 명물이다. 등대는 신포시장이 개항의 역사와 함께 시작됐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신포시장에서 수녀님이 가끔 눈에 띄었다. 수녀님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의아해 하며 발길을 옮겼는데, 시장 바로 앞에 성당이 있었다.

인천한복판 답동 언덕에 자리한 성당은 19세기 말 제물포에 건립됐다. 개항기 때 제물포가 서울의 관문이고 외국 무역의 거점이 될 수 있는 좋은 입지적 조건을 갖췄기 때문이다.

답동성당은 인천의 첫 번째 성당이다. 웅장하고 화려한 자태로 인천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문화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지로 지정됐다. 언덕을 올라 정문안으로 들어서니 위풍당당한 성당의 모습이 고풍스럽다.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건물은 유럽의 오래된 성당과 별반 다르지 않다.

벽돌마다 나이테처럼 세월의 흔적을 발견 할 수 있고 명동성당과 나이가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대문은 삐걱거리며 백 년 전으로 들어가는 출입문 같다. 문턱을 넘으니 재단 위에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과 십자가를 떠받들고 있는 아기 천사가 보인다. 예수님 양 옆에 있는 예수님의 고통을 바라보는 마리아의 모습이 애달프다.

재단과 소품은 시간이 멈춰있고 과거의 손때 와 현대인의 소망이 더해져 백 년의 세월이 덧씌워져 있다. 벽면을 둘러싼 창문의 스테인드글라스 무늬를 뚫고 햇살 몇 줄기가 영롱하게 스며든다. 한낮인데도 성당안은 어두컴컴하고 창문마다 스테인드글라스 빛깔의 성스러운 분위기에 압도된다.

백여 년 전 한불수호통상조약의 체결로 개항지에서의 토지 매입과 성전 건축이 가능해지자 블랑 주교는 국제도시로 부상하고 있던 제물포에 코스트 신부를 파견해 성당 건립을 서두르게 된다.

이후 페낭신학교에 있던 빌렘(홍 요셉) 신부가 초대 주임신부를 맡아 인천지역 첫 번째 본당인 제물포본당(답동본당의 원래 이름)을 설립하게 됐다. 빌렘 신부는 일주일 후 임시 성당으로 마련한 가옥에서 감격적인 첫 미사를 봉헌했다.

첫 미사의 감격은 지금도 전해지는 것 같다. 천주교가 조선에 처음 유입됐을 때 온갖 박해를 견뎌내며 서민을 대상으로 널리 선교를 펴나갔다. 그렇게 17 세기 말 조선 천주교의 역사가 시작됐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몇 줄기 빛을 보면서 이재용 감독의 영화 조선남녀상열지사 스캔들이 생각났다. 영화에선 됴씨추문록이라는 야한 그림이 그려진 화첩의 난잡한 성행위 모습이 숨겨있는 비화를 영화로 만들었다.

주인공 배용준의 연기는 겨울연가에서 첫사랑을 끝까지 지키며 간직하려는 애잔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한량이라는 새로운 색이 덧칠해져 신선했다. 부인과 사별한 희대의 한량 조원(배용준)과 판서집의 정실부인 사촌누이 요부 조 씨 부인(이 미숙)과는 남들 눈을 피해야하는 불륜 사이다.

하지만 둘은 서로를 원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열녀문을 하사받은 청상과부 숙부인(전도연)을 두고 내기를 한다. 한량인 조원은 열녀 숙부인을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 먼저 사랑하게 되면 지는 내기인 것이다.

숙부인은 열녀문까지 받은 청상과부이면서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다. 조원의 끈질긴 구애에 숙부인은 마음을 열고 조원을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사랑을 고백 받은 조원은 그 때부터 숙부인을 멀리한다.

한량 조원은 숙부인에게 그동안의 숙부인을 두고 요부 조 씨(이미숙) 부인과 내기였음 알리며 더 이상 숙부인이 찾아오지 못하게 매몰차게 외면한다.

몸과 마음을 농락당한 숙부인은 그 충격으로 자살하고 만다. 뒤늦게 숙부인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사실을 안 조원은 망연자실하며 조 씨(이미숙)부인 남편이 휘두른 칼에 저항하지 않고 죽음을 맞는다.

영화 속 숙부인이 청산과부가 되고 나서 그녀의 삶을 지탱해준 것은 종교의 힘이었다. 천주교 교리로는 인간의 신분은 높고 낮음 없이 평등해 당시 천주교의 종교관은 조선의 민중들에겐 계급사회에 대한 저항의 시초가 됐다.

종교는 또 다른 종교와 갈등을 빚기도 하고 조화를 이루기도 하며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인도 여행 중 캘커타 슈슈노바 중증장애 아동보호시설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활동을 잠시 한 적이 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숙소 앞에서 만나 따스한 짜이 한 잔으로 새벽을 시작했다. 짜이를 마시고 바로 릭샤를 타고 마더 테라사 수녀의 성당에서 난생처음 미사를 드렸다. 테레사 수녀는 가난과 질병, 배고픔으로 힘겨워하는 인도 사람들을 박애 정신으로 보살폈다.

그 후 세계적으로 테라사 수녀의 박애 정신을 본받고자 전 세계 사람들이 켈커타에 몰려든다. 미사를 보는 성당엔 테레사 수녀님의 초상과 모형도 재단 한 켠에 모셔져 추앙받고 있다.

그곳에서 처음 미사를 드렸고 그 시간은 숙연했다. 처음 접하는 천주교 의식은 낯설고 어색했지만 왠지 모를 성스러움과 종교 의식에 압도됐었다.

종교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실로 크다. 답동성당의 웅장한 건물도 압도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종교는 나약한 사람의 마음을 굳건하게 지켜주는 절대적인 무엇이다. 실체는 보이지 않아도 실체의 모습일 것이라고 여기며 끝없이 인간의 모난 성품을 다듬는다.

백 년 전의 사람들이 답동성당에서 기도를 드렸듯이 백년 후의 사람도 똑 같은 장소에서 기도를 드릴 것이다.

•가는 길

동인천역에서 내려 신포시장 방향 1키로 남짓

•먹거리

화평동 세숫대야 냉면 거리(동인천역 근처)

신포시장 닭 강정

•장애인화장실

동인천역, 신포시장 내

•문의

휠체어 배낭여행,

http://cafe.daum.net/travelwheelch

신포 국제시장. ⓒ전윤선

닭강정. ⓒ전윤선

시포시장 내 개항기 조형물. ⓒ전윤선

신포시장 풍경. ⓒ전윤선

사적 답동성당. ⓒ전윤선

압도하는 성당 내 분위기. ⓒ전윤선

성스러운 스테인드글라스. ⓒ전윤선

신포시장 내 오색 만두. ⓒ전윤선

신포시장 쉼터 내 화장실. ⓒ전윤선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

전윤선 칼럼니스트
여행은 자신의 삶을 일시적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천차만별이지만 일상을 벗어나 여행이 주는 해방감은 평등해야 한다. 물리적 환경에 접근성을 높이고 인식의 장벽을 걷어내며 꼼꼼하고 정확한 정보가 제공되어야 한다. 돈 쓰며 차별받지 않는 여행, 소비자로서 존중받는 여행은 끊어진 여행 사슬을 잇는 모두를 위한 관광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