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언론보도에서 보셨을지 모르겠지만 영국은 요즘 매일같이 비가 옵니다. 영하로 내려가는 일은 거의 없고 영상 1~2도를 왔다갔다 하는 온도에 매일같이 지겹도록 오는 비. 다행히 저희 가족이 사는 리즈에는 대단한 폭우는 없어서 홍수는 피해갔는데 영국 남부지방은 때아닌 겨울 홍수에 물난리가 났다는 얘기가 연일 헤드라인 기사로 뜨고 있을 정도지요. 260년만에 찾아온 최악의 겨울이랍니다.

추적추적한 날씨 덕분에 밖에 나가 놀지도 못가고 집에만 있는 것이 지겨운 아이들이 오죽하면 "sunshine나오고 rain이랑 wind랑 없으면 우리 놀이터에 가요"라고 합니다.

그러던 어떤 날, 막내가 그토록 원하던 'sunshine'이 아주 잠깐 나온 걸 보고 밖에 나가자고 졸라대기 시작합니다. 사실 좀 전까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이런 상황에 휠체어를 끌고 나가면 바퀴에 찐득하게 묻을 진흙과 그 진흙묻은 바퀴를 미느라 아이 옷이 어떻게 될 지는 안봐도 뻔한 상황.

조심스럽게 안될 것 같다고 하자 "밖에도 못나가게 하고……." 이러면서 막내는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합니다.

땅이 질척질척하니까 놀이터에 가는 대신 집 뒤에 딸린 뒷마당에 나가기로 했습니다. 집 뒷마당에는 아이들이 탈 수 있는 그네가 놓여 있고, 그네 아랫쪽 바닥에는 방수가 되는 우레탄이 깔려 있어서 질척한 잔디를 밟지는 않아도 되니 어느 정도 아이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 엄마아빠의 꼼수입니다.

설상가상 갑자기 막내가 축구를 하겠다고 야심차게 공을 들고 나갑니다. 그 질척한 땅에서 말이지요. 뭐 막내님의 결정사항이니 따를 수밖에요.

덕분에 질척한 땅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면서 다같이 공차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다리를 전혀 사용하지 못하는 주언이가 어떻게 공차기를 하느냐구요?

아빠의 도움을 받아 공을 차고 있는 주언. ⓒ이은희

사실 주언이는 학교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체육(PE)시간이랍니다. 한국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 곳에서는 전혀 제약없이 아이가 참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신체적 제약 때문에 모든 운동에 참여할 수는 없겠지만요. 적어도 제도적, 심리적 제약은 없다는 얘기이지요.

운동을 잘하는 아빠 덕분에 기질적으로 운동을 좋아하는 것일지는 모르지만, 주언이는 어떤 운동이든 본인이 직접 참여하고 싶어합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안타깝지만, 아이가 그토록 하고 싶어하니 어떤 식으로든 방법을 찾아볼 수밖에요.

"I am a swing kicker". ⓒ이은희

하여간, 그렇게 시작한 우리만의 공놀이. 막내가 공을 차면 아빠의 힘을 빌어 주언이가 공을 받습니다. 또 역시 아빠의 힘을 빌어 멈춰있는 공을 차기도 합니다. 그러면 또 막내가 공을 받고…….

그렇지만 금세 도달한 아빠의 체력의 한계. 그러다 주언이가 고안해 낸 주언이만의 공차기를 합니다.

주언이를 그네에 앉혀놓고 밀어주면 그네 밑에 있던 세워든 공을 발로 건드려 뻥 차는 것입니다. 신이 난 주언이가 소리높여 외칩니다. "I am a swing kicker(나는 그네타면서 공찬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했던가요. 주언이 스스로의 힘으로 다리를 움직여 공을 차지는 못해도 아쉬우나마 이렇게 공을 차면서 주언이도 막내도 한동안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부모는 아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해결해 줄 수 없을 때 능력의 한계를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언이는 또 이렇게 부모에게 면죄부를 주는군요. 결코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했던 공차기를 스스로 고안해내면서 적어도 아이 자신이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을 가졌으니까 말입니다.

이 곳에서 장애인을 위한 휠체어 스포츠는 만 여덟 살이 되어야 시작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식으로든 아이를 위해 방법을 찾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좀 더 빨리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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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희 칼럼리스트
주언이가 보통 아이처럼 건강했으면 결코 알지 못했을 사회의 여러 구석들과 만나면서 아이 덕분에 또 하나의 새로운 인생을 얻은 엄마 이은희. 가족들과 함께 낯선 땅 영국에서 제3의 인생을 펼쳐가고 있는데... 이방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좌충우돌 일상사를, 영국에서 보내온 그녀의 편지를 통해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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