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이 된 것은 종교적으로 누구의 잘못일까?

성경에 나오는 장애인 구절을 먼저 검토해 보자. 레위기 16장 14절에 ‘너희는 귀먹은 이에게 악담해서는 안 된다. 눈먼 이 앞에 장애물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구절이 있으며, 누가복음 14장 13절에서는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라고 적고 있다.

이사야서 42장 18절에서는 ‘너희 귀먹은 자들아’라고 적고 있고, 이사야서 43장 8절에서는 ‘눈이 있어도 눈먼 이 백성들’이라고 적고 있다.

요한복음서 9장 2절에는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라고 묻고 있다. 그리고 레위기 21장 17절에는 ’너의 후손 대대로 몸에 흠이 있는 사람은 자기 하느님에게 양식을 바치러 가까이 오지 못한다‘라고 되어 있다.

성경에 나오는 장애인 유형을 보면 병허약(삐쩍 마른 사람)도 있고, 안면장애도 있어 정말 다양한 장애인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구약에서는 장애인은 교회에 출입을 금하고 있으며, 장애인을 배려하고 대접하라고 하고 있다. 또한 장애인이 된 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요 하느님이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장애인은 실제로 손상을 입은 사람도 있지만,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사람을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장애인이요, 인간의 속성을 장애로 보고 영혼의 무장애 공간이 교회라는 것을 장애인을 예로 들어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으며, 그러한 장애의 치유를 신앙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농인은 신앙고백을 말할 수 없으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라고 하였고, 하느님을 보고 말씀을 들으면 장애의 치유가 가능하므로 이미 장애인이 아니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고통이 있는 현세는 장애사회이며, 신앙이 바로 장애해방의 과정이라고 해석하여 은유법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교회는 치유도 하고, 장애인이 누구의 탓도 아니라고 하니 장애인에 대하여 인식개선이 되어 있다고 하는 이도 있고, 구약의 예를 들어 장애인은 교회에 들어가지 못하니 차별이 있다고도 한다.

이에 비해 불교는 업보설과 인연설, 윤회설을 가지고 있다. 최근 해피법당(불교닷컴)에서 ‘교회는 장애인은 누구의 탓도 아니라 하느님이 특별하게 쓰기 위해 장애를 갖게 되었다고 하는데, 불교는 자기업보라고 하니 장애인 누가 절에 오겠느냐?’는 질문이 있었다.

해피는 解彼, 즉 대상의 올바른 이해를 통해서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헤피스님은 한국테라와다불교교단 소속으로 법명은 뿐냐디빠(공덕의 섬)이시다.

해피스님은 글에서 “교회에 가면,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쓰기 위해 장애를 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부여한 특별한 쓰임새를 알고, 그 쓰임새를 다하는 삶을 살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특별한 삶의 선택된 당사자로서 당당하고 자신있고 차별 받지 않게 삽니다. 그런데 절에 가면, 인과(因果)를 말합니다. 전생에 지은 바 업보(業報)요, 업장(業障)이니 누구를 탓할 것입니까? 자기가 과거에 잘못한 탓에 현재의 아픔을 과보로써 겪는 것이니 참회하며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생에 죄 지은 표식으로 나타난 장애를 껴안고 눈치보며 타의적으로 차별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교리적 차이가 있는데, 장애를 가진 사람 중에 누가 절에 다니려고 하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이렇게 답한다.

“그런데 이것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초기 근본불경(니까야)에서 부처님은 업보로서의 장애를 말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업에 의해 태어남을 설명합니다. 특히, <업에 대한 작은 분석의 경>에서는 「이와 같이 중생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중생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라며, 14가지로 행위를 구분한 '업보로서의 태어남'을 말합니다. 그 중 장애는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장애를 업보라고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쭐라깜마위방가경(업에 대한 작은 분석의 경)(M135)에 따르면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쑤바: “존자 고따마여, 어떠한 원인과 어떠한 조건 때문에 인간의 모습을 한 인간들 사이에 천하고 귀한 차별이 있습니까? 존자 고따마여, 참으로 인간들은 목숨이 짧기도 하고 목숨이 길기도 하고, 질병이 많기도 하고 질병이 없기도 하고, 용모가 추하기도 하고, 용모가 아름답기도 하고, 권세가 없기도 하고, 권세가 있기도 하고, 빈궁하기도 하고, 부유하기도 하고, 비천하기도 하고 고귀하기도 하고, 우둔하기도 하고 현명하기도 합니다. 존자 고따마여, 어떠한 원인과 어떠한 조건 때문에 인간의 모습을 한 인간들 사이에 천하고 귀한 차별이 있습니까?”

세존: “바라문 청년이여, 뭇 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뭇 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

해피스님은 ‘부처님 가르침에 의하면, 몸과 마음은 ①서로 조건이 되는 관계이고, ②뿌리를 달리 하는 관계로, 몸은 부모에게서 생기고, 마음은 전생으로부터 모태에 드는 것이다. 장애는 몸에 따르는 것이지 마음에 따르는 것이 아니므로 업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비롯된 것이거나 어머니의 스트레스 등의 문제이다’라고 설파하고 있다.

그렇다면 몸이 업보도 없는데 고생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바로 인연 때문이다.

불교 인연론에서 12연기는 논리적 관계로, 즉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처(六處)·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 등이다. 오온은 정서적 관계로, 색, 수, 상, 행, 식을 말하며, 오취온이라고도 한다. 오온은 단멸론으로서 오온을 떨쳐내면 해탈을 한다고 한다.

발라빤디따경(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슴하신다.

“수행승들이여, 거기에는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약육강식만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그 어리석은 자는 오랜 세월이 지나 언젠가 어느 곳에선가 인간의 몸을 얻는다면, 그 때마다 비천한 가문 즉 짠달라의 가문, 사냥꾼의 가문, 죽세공의 가문, 수레공의 가문, 백정의 가문과 같은 가난하고 음식이 모자라고 곤궁하게 사는 가문에 다시 태어난다. 그 곳에서는 음식과 의복을 얻기도 힘들다. 그는 용모가 악하고 모습이 추하고 왜소하고 질병이 많고, 눈멀거나 팔병신이거나 절름발이이거나 반신불수이고, 음식, 의복, 수레, 화환, 향료, 크림, 침대, 집, 등불을 얻지 못한다.”

여기에서 보면 장애는 업보로 보고 있다. 업보에 의한 자기원인설과 부모로부터 비롯된다는 타자원인설 외에 부처의 말에 인연설 즉 관계설에 의한 것이라는 구절도 있다. “벗들이여, 괴로움은 연유가 있어서 생겨나는 것이다. 무엇을 연유로 해서 생겨나는가? 접촉을 연유로 해서 생겨난다.”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접촉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접촉이 있었기 때문에 괴로움도 생겨나는 것이고 업도 발생하는 것이다. 장애 역시 태어날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접촉에 따라 태어난 것으로 본다.

업보설은 모든 사람을 잠재적 장애인으로 보는 것을 포함하고 있으며, 선행으로 후생에서 장애에서 해방된다고 본다. 장애인을 보면 “나도 한 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보아야 한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모든 인간은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있으며, 정신적 장애는 다름 아닌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 악의와 원한, 해태와 혼침, 흥분과 회환, 의심 이렇게 다섯가지 장애를 말한다.

장애인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 저주이거나 업보로 보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장애인이라 생각하라는 불교의 교리와 장애를 신앙으로 보면 모두가 장애인이라는 말은 상통한다.

장애인에 대한 태도도 상통하고 있다. 장애인 당사자의 자세는 신앙을 가지라는 것과 선행을 하라는 것도 모두 종교적 가르침으로 해결하고 있다. 죄의 대가로 차별을 당연시하거나 업보로 보는 부분도 있고, 영생이나 해탈의 한 과정으로 보는 것도 공통된다.

손상을 입으면 가해자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장애는 분명 부정적 결과이다. 여성이 되었다고 손해배상을 청구하지는 않는다. 장애는 부족함이라는 것을 두 종교는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주로 선천적 장애에 집중하여 해석하고 있다. 생명을 존중하는 것도 동일하고, 배려해야 함도 동일하다. 이런 점에서 장애를 개성으로 보는 것은 무리일지 모른다.

장애는 탓의 대상이 아니다. 장애의 탓이 쓰임을 위하여나 관계에 의한 것이라는 것은 의학적이거나 생물학적인 요인에서 사회적 모델로 바라본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평등과 권리에 기반한다고 보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이는 두 종교가 모두 국가의 책임을 말하는 종교는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장애는 희생일 수도 있고, 완전함을 사회가 보장해 주지 못함일 수도 있으며, 문화에 따라 장애는 만들어지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구의 탓이냐고 묻는 두 종교의 질문 버전의 유사성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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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환 칼럼니스트
현재 사단법인 장애인인권센터 회장, 한국장애인고용안정협회 고용안정지원본부장을 맡고 있다. 칼럼을 통해서는 아·태 장애인, 장애인운동 현장의 소식을 전하고 특히, 정부 복지정책 등 장애인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이슈에 대해 가감 없는 평가와 생각을 내비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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