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던가.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채웠으니 이젠 전주 한옥마을로 눈과 마음을 채울 차례다.

차를 타고 십여 분쯤 가니 한옥마을 입구가 나온다. 골목을 따라 공예품 전시관 쪽에 차를 세우고 휠체어로 걸어 나왔다.

전주 한옥마을은 서울의 북촌 한옥처럼 사람들이 거주하는 공간이지만 전주만의 특색이 잘 묻어난다. 한옥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에서 물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지고 기와지붕엔 하얀 눈이 정지돼 있어 검은 기와장과 조화를 이룬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여행이라 했던가. 전주는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문화 도시로 한옥․한식․한지 등 한국 스타일을 체험할 수 있는 특별한 여행지다

마을 입구 오른쪽엔 한옥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천주교 전주교구인 전동성당이 하늘을 찌를 듯한 자태로 서 있다. 한옥과 서양식 성당의 조화가 왠지 낯설지만 묘한 일체감이 든다.

전동성당은 완전한 격식을 갖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동서양의 융합된 모습의 곡선미가 가장 아름답고 웅장하여 어머니 품처럼 따스함을 느끼게 한다. 특히 열두 개의 창이 있는 종탑부와 팔각형 창을 낸 자우 계단의 돔은 성당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상징물로 꼽히고 있다.

휴일이라서 그런지 성당 안엔 미사를 드리러 온 신도들과 관광객이 엉켜있다.

카메라 렌즈를 종탑 위로 세팅하고 셔터를 눌러대니 종탑에 머물고 있는 겨울햇살이 렌즈 속으로 파고 들어온다.

전주한옥마을이 생기기 시작한 것도 근대에 이뤄진 것이라고 한다. 을사조약 이후 일본인들이 전주에 처음 거주하게 된 서문 밖이 지금의 다가동 근처의 전주천변이라고 한다.

서문 밖은 주로 천민이나 상인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당시 성 안과 밖은 엄연한 신분의 차이가 있었다. 성곽은 계급의 차이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존재했던 것이다.

성 안과 밖의 거주자 신분은 당시 조선의 상황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었다. 세계 각 나라에서도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성 안에서 거주하고 성 밖은 빈민들이 거주하며 힘겨운 삶을 살아냈다.

몇 년 전 인도 여행 시 들렀던 라자스탄이주 자이살메르성에도 신분의 차이가 존재한다. 인도엔 지금도 신분제도가 관습으로 내려오고 있기 때문에 성안엔 계급이 높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이십일 세기에도 그러한다 일제강점기인 이십세기 중반 전주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을사조약 후 일본인들이 성안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 실제로 서문 근처에서 행상을 하던 일본인들이 다가동과 중앙동으로 진출하면서 3차례에 걸친 시구 개정에 의해 전주의 거리가 격자화되고, 상권이 형성되면서 일본상인들이 전주 최대의 상권을 차지하게 됐다.

이러한 상황은 해방 전까지 지속됐다 이후 1930년을 전후로 일본인들의 세력 확장에 대한 반발로 한국인들은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촌을 형성하기 시작하면서 일본인 주택에 대한 대립의식과 민족적 자긍심으로 선교사촌과 학교, 교회당 등이 어울려 기묘한 도시색을 연출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전동성당은 한옥마을보다 훨씬 먼저 이 곳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 또한 성당 맞은편 조선왕조 오백년의 역사가 담긴 경기전에는 우리나라 유일의 태조 이성계 영정이 봉안되어 있었다.

경기전엔 전날 내린 눈으로 고풍스러움에 운치를 더한다. 눈이 채 녹지 않아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 길은 반질반질 다져져 얼음판이다. 자칫 한눈이라도 팔면 바로 넘어질 기세다. 눈길엔 두발로 보행하는 것보다 네 바퀴로 보행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고 빠른 것 같다. 두발로 걷는 사람들은 엉금엉금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스럽기만 하다. 그 옆을 쌩 하고 지나가니 어르신들이 부러워한다.

경기전 안으로 들어가 왕의 어전이 모셔진 곳으로 갔다. 하지만 어전까지 접근은 턱이 있어 불가능 했다. 왔던 길로 가기엔 아쉬워 뒷문 쪽으로 갔다. 뒤뜰엔 푸른 대나무가 겨울바람을 숲으로 불러들인다. 바람이 불 때마다 대나무는 바람길을 만들어 내고 곧게 뻗은 마디마다 겨울을 버텨내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새겨진다.

태조로를 따라 한옥 골목으로 발길을 옮겼다. 조선시대 풍경을 연출하는 골목은 황토색 돌담과 기와지붕의 곡선이 부드럽게 흐른다. 대부분의 한옥들은 공방과 찻집 식당으로 장사꾼의 냄새가 진하다. 그렇지만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전주 사람들의 구수한 입담이 발길을 잡아 골목 한켠에 마련된 좌판에서 한과와 열쇠고리를 샀다.

한참을 골목탐험에 정신 팔려 있는데 화장실이 급하다. 전주공예품 전시관으로 가니 예향의 도시답게 뒷간 문도 다르다. 조선시대 방문을 화장실 문으로 사용하고 있고 화장실 안은 현대식 양변기와 안전손잡이 잘 마련돼 있다. 볼일을 마치고 다시 이동한다.

전주에 왔으니 막걸리 골목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막걸리 한주전자를 시키면 한상 가득 안주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온다고 한다. 골목 이 곳 저 곳을 돌며 휠체어가 들어갈 만한 곳을 찾았다. 다행히 휠체어가 접근할만한 전주의 명가 막걸리 전문점을 찾았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얼큰하게 취한 쥔장이 반긴다.

“어서 오세요. 전주막걸리 명가에 오신걸 환영해요. 막걸리 한 주전자에 안주는 무한 리필입니다”

쥔장은 막걸리에 대한 자부심이 대하다.

“막걸리 많이 마시면 머리 아프다고 하는데, 소주 있나요?”

“전주 막걸리는 달라요 동상. 여그봐바 막걸리 떼깔부터 다르잖아. 투명한 것이 얼마니 떼깔이 이뻐. 전주막걸리 한 번 마셔보면 다른 데 막걸리는 절대 못 먹지 암만! ……술 마실 때도 주도가 있는 법이여. 인사불성될 정도로 마시고 주정하면서 피해를 주면 주도에 어긋나제 암만!”

쥔장은 끝없는 막걸리 자랑을 하면서 첫 주전자에 나오는 안주를 자랑한다.

“막걸리 한주전자에 안주가 한 상 나와. 근데 동상 이 안주를 다 먹고 두 번째 주전자가 나오면 다른 안주로 또 한 상 나오징.”

“사장님 전 술을 못해서요. 안주로 저녁을 대신 할만한 것 있을까요?”

“있지. 근데 우리집 자랑거리 게장과 계란찜인데 정말 맛있어. 어찌 게장 먼저 주문할거여?”

“네 게장하고 계란찜 주세요.”

곧 이어 큰 접시에 게장과 뚝배기에 보글보글 끓는 계란찜이 나온다. 하얀 쌀밥에 게장을 한 입 먹으니 밥도둑이 따로 없다. 게장이라고 하면 좀 짜다 싶은데 이집 게장은 짜지도 않고 심심한 것이 자꾸 입맛이 당긴다. 게다가 뜨끈한 계란찜은 다른 곳에서 먹어본 것과 차원이 다른 맛이다.

전주 맛여행의 종결인 막걸리 명가에서 황홀한 맛여행에 다시 한 번 빠져든다. 그리고 막걸리를 먹는 동안 쥔장의 막걸리 사랑은 끝없이 이어진다.

“막걸리는 마시는 것도 예의와 주도를 지켜야 하는 거여.”하면서 연신 막걸리에 대한 자부심으로 쉴 새 없이 자랑을 늘어놓는다.

막걸리를 마셔 취하되 인사불성이 될 만큼 취하지 않음이 일덕이요, 다른 술과 달리 새참에 마시면 요기되는 것이 이덕이며, 힘이 빠졌을 때 기운을 돋우는 것이 삼덕이다. 안되던 일도 마시고 넌지시 웃으면 되는 것이 사덕이며, 큰 한 잔 막걸리를 여럿이 더불어 마시면 응어리가 풀리는 것이 오덕이다. 암은 물론이고 성인병 예방과 간에 좋으며 장에도 무리가 되지 않는다고 함이 육덕이다.

삼반의 뜻도 가히 명언이다. 근로지향의 반 유한적이며, 서민지향의 반 귀족적이고, 평등지향의 반 계급적이니 어찌 막걸리에 취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이 모든 것이 과하지 않게 적당히 즐기는 것이다.

술을 잘 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막걸리에 대한 육덕 삼반의 명언만으로도 충분히 취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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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한옥마을 태조로 풍경. ⓒ전윤선

막걸리의 고향. ⓒ전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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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윤선 칼럼니스트
여행은 자신의 삶을 일시적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천차만별이지만 일상을 벗어나 여행이 주는 해방감은 평등해야 한다. 물리적 환경에 접근성을 높이고 인식의 장벽을 걷어내며 꼼꼼하고 정확한 정보가 제공되어야 한다. 돈 쓰며 차별받지 않는 여행, 소비자로서 존중받는 여행은 끊어진 여행 사슬을 잇는 모두를 위한 관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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