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하늘 타들어 가는 대지, 연일 재난에 가까운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더위에 약한 장애인들은 이번 여름을 무사히 넘기는 것도 힘겨울 정도다. 숨 쉴 때마다 뜨거운 공기가 폐속 깊이 스며들고, 거리는 아스팔트와 에어컨에서 나오는 열기가 만나 더 뜨겁다.

한 여름의 열기가 절정을 치달을 즈음 도심을 벗어날 곳을 찾아 이곳저곳 기웃거려 본다. 무작정 서울역으로 갔다. 딱히 행선지를 정하지 않고 도착한 시간에 맞춰 가장 빨리 떠나는 열차에 오르기로 했다. 역에 도착해서 가장 빠르게 떠나는 열차는 부산행 KTX.

열차에 오르니 시원한 기온에어컨 바람이 온 몸에 스며든다. 이 시원함. 여기가 바로 천국이구나. 부산역에 내려 어디로 갈까 잠시 고민에 빠진다. 역 앞 관광안내소에서 관광지 지도를 펼쳐들고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태종대로 가기로 정했다.

부산장애인콜택시 두리발을 예약하고 역사에 앉아 기다린다. 십분쯤 지났을까 택시가 연결됐다는 메시지가 뜬다. 곳 이어 차량에 승차한다. 기사님 태종대로 갈 건데요. 경치 좋은 길로 가주세요. 부산역에서 태종대까지는 17km로 남짓. 기사님은 태종대 가는 길, 갈매길 소개에 여념 없다.

태종대에는 학창시절 틀에 박힌 교실안의 답답함을 벗어나고 싶은 충동으로 무작정 떠난 여행지였다. 그땐 학생신분이어서 여비조차 여유롭지 못해 비둘기호를 타고 밤새 내려온 부산. 교복을 입은 채로 서울을 무작정 떠나온 곳이 부산이었고 새벽에 도착한 부산은 낯설고 무서웠다.

어릴 때부터 낮선 곳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을 가지고 있던 난 무작정 떠나온 부산에 대한 두려운 마음을 호기심으로 이겨내며 지나가는 꼬마에게 태종대 가는 길을 물어봤었다. 그런데 그 꼬마가 부산사투리로 길을 가르쳐 주니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사투리를 쓰는 꼬마가 어찌나 신기하고 예쁜지 꼬마를 붙들고 자꾸 물어보고 또 물어본 기억이 난다.

대종대 전망대. ⓒ전윤선

태종대 입구에 도착하니 기억 속 오래된 흑백필름이 슬라이드처럼 지나간다. 당시와 지금은 사뭇 다른 풍경같지만 워낙에 오래된 기억이어서 그런지 기억 속 필름이 꼬인 것 같다. 태종대 입구로 진입하니 약간 경사가 졌지만 전동휠체어로 걸어서 올라가는 것이 어렵진 않다.

태종대 광장입구엔 '다비누' 열차가 손님을 기다린다. 다비누 열차는 리프트가 장착된 열차와 그렇지 않은 열차 두 종료의 열차가 있다. 열차를 타고 태종대 한 바퀴를 둘러볼 수도 있지만 천천히 걸으며 자세히 둘러보기로 했다. 광장 앞에 두 갈래의 길이 있어 어느 쪽으로 갈까 잠깐 고민하다가 좌측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좌측 순환도로는 약간 가파르지만 보행에 어려움은 없다. 순환도로는 숲길이 이어져 가쁜 숨을 돌리게 한다. 숲의 시원한 바람과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만나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숲길 한가운데를 지날 때 태종사가 눈에 띈다. 태종사에는 수국축제라는 현수막이 걸려있었지만 이미 축제는 끝이 났다. 흐드러지게 핀 수국은 오간데 없고 시들어가는 수국 뿐, 제몫의 아름다움을 다하고 시들어가는 꽃을 보니 우리내 인생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태종사는 우리나라 최대의 수국꽃 군락지로, 7월 수국꽃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수국축제에서는 태종사가 40여 년 동안 가꿔온 수국 200여 종이 전시되고, 조실 도성스님의 법문을 비롯해 산사음악회, 전통놀이마당, 퓨전타악 공연 등이 함께 열려 축제 분위기가 한껏 고조된다고 한다.

다시 발길을 재촉해 등대 자갈마당을 천천히 걸어간다. 태종대 안에는 푸른 해안선을 끼고 자갈마당이 세군데 있다. 입구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등대 자갈마당과 태원자갈마당, 그리고 감지자갈마당이다. 넓게 펼쳐진 천연자갈이 파도를 만나 맑은 소리와 함께 오감이 편안해지는 자갈마당에서는 태종대 앞바다의 신선한 해산물을 직접 손질해 주는 해녀들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두 곳은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은 접근할 수 없다. 할 수 없이 먼 발치에서만 지켜볼 수밖에 없다.

등대를 뒤로하고 남쪽 전망대로 갔다. 전망대 앞에 서니 부산앞바다가 시원하게 여행객을 맞는다. 이곳에선 먼 바다까지 볼 수 있게 망원경이 마련돼 있고 매점과 화장실 등 편의시설 갖춰져 있다.

이곳에서 잠시 땀을 식힌다. 하늘과 맞닿은 파란바다는 둥그런 원이 그려진 듯하다. 코발트색 바다, 파란 하늘, 그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섬, 멀리 여객선과 유람선이 태종대 바다 위를 구름처럼 흘러가고, 하늘과 바다는 경계가 사라졌다.

사람의 손으로 빚어낸다면 저토록 큰 아름다움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다시 발길을 옮겨 감지해변에 있는 자갈마당으로 갔다.

코발트 빛 바다. ⓒ전윤선

감지자갈마당은 태종대 아래에 있는 곳, 해변을 따라 포장마차들이 밀집된 곳이다. 이 곳 포장마차에서 밀려오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먹는 조개구이는 가히 일품이다.

자갈마당은 부산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곳이다. 자갈마당은 야구선수 이대호가 자주 간다하여 더욱 유명해졌다. 조개구이와 꼼장어 소주 한 병을 주문하고 식당 안을 살펴본다.

바닥을 천천히 살펴보니 식당은 바다위에 만들어져 있고 젖혀진 천막사이로 감지해변이 눈앞에 펼쳐진다. 자갈마당 입구부터 조개구이 집들이 늘어서 있지만 맨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이곳엔 턱이 없어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이 접근하기 편리하다.

불판 위에 숯불이 올려진다. 그리곤 활활 타오르는 붉은 숯불 위에 석쇠가 얹히고, 그 위에 부채모양의 가리비 조개가 올라앉는다. 잠시 후 타닥거리며 익어가는 조개의 흰 속살과 소주 한 잔은 다시 무작정 부산에서의 일들이 떠오르게 한다.

부산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과 나 자신에게 포상이라도 한 듯 세상시름 모두 잊게 한다. 소주잔이 비워질 즈음 파스텔 물감을 손으로 문지른 듯한 감지해변의 저녁해는 저물어 가고 태종대를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그리고 이별은 언제나 아쉬움을 남긴다.

• 가는 길

KTX 열차 이용, 부산역 하차

부산장콜(두리발) 051-466-2280

• 먹거리

태종대 감지해변 자갈마당 조개구이

• 화장실

태종대, 자갈마당 내 장애인 화장실 잘 마련돼 있다

• 주변볼거리

부산역 주변, 용두산공원, 차이나타운, 자갈치시장, 남포동

• 문 의

다음카페, 휠체어배낭여행

http://cafe.daum.net/travelwheel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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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윤선 칼럼니스트
여행은 자신의 삶을 일시적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천차만별이지만 일상을 벗어나 여행이 주는 해방감은 평등해야 한다. 물리적 환경에 접근성을 높이고 인식의 장벽을 걷어내며 꼼꼼하고 정확한 정보가 제공되어야 한다. 돈 쓰며 차별받지 않는 여행, 소비자로서 존중받는 여행은 끊어진 여행 사슬을 잇는 모두를 위한 관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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