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극장에서 도전해 본 한국 영화는 ‘태극기 휘날리며’였다.

2004년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의 인기가 무척 좋아서 우리도 한 번 보자고 표를 과감하게 예매했으나, 영화가 끝난 후 웃으며 나오는 비장애인들과 달리 청각장애가 있는 우리는 영화관에서 눈을 비비며 나올 수밖에 없었다. 영화가 무슨 내용으로 흘러가는지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국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DVD(영/한 자막 기본 삽입)를 대여해서 집에서 보는 것뿐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집에 DVD를 재생할 수 있는 기기가 없었고, 그런 것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2009년 어느 날, 농인 친구가 한국 영화를 보자며 DVD를 빌려왔다. 영화 제목은 ‘7급 공무원’. 자그마한 19인치 컴퓨터 모니터 화면을 통해 본 한국영화는 지금까지 내가 선호했던 외국영화 리스트 순위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지금까지 외국 영화에서 개그코드라고 집어넣는 말장난에는 그저 피식 웃고 말았지만, 한국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말장난에는 배를 움켜쥐고 엄청나게 웃었다.

우리나라 영화가 이렇게 재미있다니……. 내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이해하고 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내가 보지 못했던 한국영화들이 너무 아까웠고, 나는 이런 점이 서글퍼졌다.

그러던 중 청각장애를 소재로 한 ‘글러브’와 ‘도가니’가 잇따라 개봉되었다. 청각장애를 소재로 했으니 영화내용이 궁금한 것은 당연지사. 그러나 원래 자막이 제공되지 않는 ‘한국영화’이다보니 정작 농인 본인들은 소외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 상황에 차별을 느낀 농인들의 자막 상영 요청이 빗발쳤고, 그제서야 영화관에서는 뒤늦게 자막상영관을 신설·확대하여 상영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한국영화를 영화관에서 보지 못하는 차별 아닌 차별을 어렸을 당시에는 너무 당연한 듯이 받아들였다. 그동안 장애로 인해 무수하게 차별받던 것에 익숙해져서 한국영화에 자막이 없는 것을 무의식 중에 인정해버린 것이다.

아무도 그것이 차별이라 가르쳐주지 않았고, 나는 그것이 차별이라 인지하지 못했다.

내가 한국영화를 보지 못하는 것을 차별이라 인지한 것은 작지만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무리 농인들이 문화향유권이니 한국영화를 볼 권리니 뭐니 외친다고 해도 정작 나 자신이 자막이 없는 한국영화를 보면서 차별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누군가 나에게 왜 한국영화에 자막을 넣어야 하는지 당위성을 주장하라고 한다면 나는 장애인이기 이전에 한 명의 국민이고 당연히 문화향유권을 즐길 권리가 있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단지 나는 한국영화를 보며 한국 사람 특유의 감수성에 공감하며 웃고 싶은 것이다. 남들이 다 느껴보는 그런 소소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참 슬프지 않은가?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위한 영어자막은 삽입하면서 정작 농인을 위한 한글자막은 거의 전무한 우리나라.

농인이 영화관에서 한국영화를 재미있게 즐기는 것이 참 어려운 우리나라.

농인들은 극장에서 보고 싶은 영화 목록에 자연스럽게 '한국영화'를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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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민지 칼럼리스트
양천구수화통역센터 청각장애인통역사로 근무하고 있다.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벗어나 사회에 첫 발을 내딛은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새내기 사회인이다. 청각장애인으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청각장애인 특유의 문화 및 사회, 그리고 수화에 대해 풀어나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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