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인 피난선의 평소 모양과 화재시의 작동 그림. ⓒ서인환

'다수인 피난선'이란 고층 아파트 배란다 한 쪽 유리면에 설치하는 것으로 화재가 날 경우 낙하산처럼 펼쳐서 아래로 내려가는 장치이다. 여러 명이 함께 탑승이 가능해 ‘다수인 피난선’이라고 한다.

화재가 나면 비상구를 찾아야 하고, 엘리베이터가 정전이 되어 작동하지 않을 수 있으므로 정전시에도 발전기가 작동되는 비상용 엘리베이터를 찾아야 한다.

여러 사람이 몰리다 보면 계단 등에서는 오히려 사고를 입을 수도 있어 가장 좋은 피난 설비는 개인이 현재 위치한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피난설비일 것이다.

와상 장애인이나 전동휠체어 장애인 등 중증 장애인의 경우, 피난을 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스스로 피난을 할 수도 없고, 구조해 주기를 기다리다가는 목숨을 잃기 십상이다.

부산 고층 아파트 화재 경우에서처럼 불은 벽을 타고 굴뚝 현상이 되어 올라온다. 그리고 연기가 가득 차서 결국 숨을 쉴 수가 없게 되는데, 장애인이 비상사태에 놓이게 되면 현재로서는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국제장애인권리협약에서나 제2차 아·태 장애인 10년에서는 장애인의 재난에 대비하도록 강조하고 있으나, 그러한 기술이나 시스템은 전혀 갖추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편의증진법상의 시행규칙 별표1의 17에 의한 시청각 장애인용 피난설비는 사실상 시각장애인과는 무관하며, 청각장애인을 위한 점멸등만을 정하고 있어 중증장애인 피난을 위한 아무런 대책도, 법적 근거도 없다.

이를 소방법에서 보장하도록 개정하자는 움직임이 18대 국회에서 있었으나, 소방방제청의 의견이 설치하는 것을 말리지 않으니 굳이 법으로 정할 필요가 없고, 장차법이나 장애인복지법으로 정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설치를 일정 한도 또는 일정 대상에 한하여 하도록 규정하는 것을 장차법에 넣으면 자신들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인지, 모든 것은 장애인 담당 부처 핑계를 대자는 것인지 모르겠다.

소방이나 재난 훈련에서 장애인을 포함하여 우선적으로 하도록 관련법을 개정한 것은 장애인 문제가 아니라 소방문제라서 그렇게 한 것인지, 돈이 들지 않기 때문에 넣은 것인지도 궁금하다.

법 상으로 여러 가지 중 하나를 소방 대책으로 강구하도록 하면 실제로 설치해야 하는 건물주는 가장 저렴하고 간단한 것을 선택할 것은 분명하다. 반면 법으로 하나 이상만 하도록 하면 선택은 국민의 몫이 된다.

소방 대책은 물건 사는 것도 아니고, 아무 것이나 하나만 있으면 되는 성격이 아니다. 자유경쟁식 적용의 법이 그러한 조건에서 가장 유리한 업체의 특혜가 될 수 있음을 생각해 본 적은 없는가? 그러기에 특정 부분은 보호장치가 필요한 것이다.

특정 업체의 항의가 두려워 또는 특혜 시비가 있지는 않나 하는 마음이 아니라 국민의 안전이 어떻게 보장되느냐의 문제 해결로 급여를 받고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중증 장애인이 위기 상황에 처하면 '다수인 피난선'의 아래 부분을 밀면 유리창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상태에서 무전력으로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도록 하여 위험 지역에서 탈출하게 한다.

일본의 쓰나미 사건으로 인하여 장애인이 피해를 당하는 비율이 260% 더 높다는 유엔의 보고가 있었다.

장애인 전체를 대상으로 통계를 낸 것의 피해가 이러하고, 원자력 발전소의 순식간의 피해에도 이러한 차이가 있는데, 몸을 움직여 피난을 가야 하는 상황에서 중증장애인의 피해는 뻔한 일일 것이고, 이러한 대책의 무관심은 장애인을 죽음으로 모는 것이다.

평소 꺼진 불도 다시보자고 외치는 소방방제청이 ‘나지 않은 불은 보지도 말자’로 표어를 바꾼 것이 아니라면 국민들에게 평소에 안전불감증을 가지지 않도록 지원하고, 시스템을 갖추도록 격려하여야 한다.

불감증은 국민의 책임 이전에 소방방제청의 책임이며, 특히 중증 장애인에 대하여 구조와 피난이라는 재난 대책의 강구는 그들의 책임인 것이다.

2년 전 보건복지부에서 장애인 판정제도를 개선하기 위하여 대한의학회에 용역하여 KAMS를 개발하도록 한 적이 있었다.

이 판정은 장애 정도를 노동력 상실로 보고 0~100으로 나누는 것이었다.

이성적이고 과학적이고 객관적이라 자처하는 의사들이 모여 어떤 장애를 입으면 몇 %의 노동력 상실율로 인정할 것인가에 대한 기준을 정하지 못하고, 그냥 합의로 정하였다.

어림짐작으로 몇 퍼센트로 하자고 하면 다른 사람이 조금 더 놀리거나 내리자고 하니 이는 흥정하여 정하는 것이다. 그 중 특정 장애 유형과 관련된 의사가 있다면 그 장애유형은 좀 더 장애를 인정받게 될 수도 있다.

그 모임에서 연구를 맡은 의사들이 불이 나면 어느 장애인이 가장 불쌍한가를 논했다고 한다.

지체는 불을 보면서도 도망가지 못하니 불쌍하고, 시각은 ‘불이야’ 소리나 싸이렌 소리를 들으나 비상구를 찾지 못하니 불쌍하고, 청각장애인은 ‘불이야’라는 소리를 듣지 못하니 불쌍하고, 지적장애인은 판단을 못하고 당황만 할 것이니 불쌍하고 등등…….

의사들이 이렇듯 장애를 안주 삼아 농담같은 이야기로 연구를 하였다니 한심하다. 그러나 그런 연구조차 하지 않는 대책 없는 소방방제청은 더욱 한심하다.

장애인시설과 재활병원의 화재로 희생된 장애인에 대한 뉴스를 우리는 자주 접한다. 정말 생명이 고귀한 것이라면 하루 빨리 '다수인 피난선'을 피난시설로 인정하고, 의무적 소방시설로 규정하여야 한다.

그리고 '다수인 피난선'은 장애인만을 위한 것도 아니고 가족 단위로 모두 함께 피난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피난설비의 안전성이나 문제점이 걱정된다면 개선하도록 정부가 지원하면 되는 것이고, 장애인의 이용 편리성을 알고 싶으면 정부가 비용을 부담하여 연구를 하면 된다.

그런데 현재는 책상에 앉아서 모든 결과를 다 개발회사나 장애인 단체가 만들어 오면 검토는 해 보겠으나, 그것도 의무적으로 하도록 부담을 할 수는 없으니 다른 기관으로 검토 업무를 넘기자는 것으로 보인다.

정말 "이건 아니잖아요!"를 천 번 외쳐도 부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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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환 칼럼니스트
현재 사단법인 장애인인권센터 회장, 한국장애인고용안정협회 고용안정지원본부장을 맡고 있다. 칼럼을 통해서는 아·태 장애인, 장애인운동 현장의 소식을 전하고 특히, 정부 복지정책 등 장애인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이슈에 대해 가감 없는 평가와 생각을 내비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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