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갈래 길과 세 번째 인생. ⓒ박종균

첫 번째 길.

동고서저. 길은 길에 연하여 있어 점촌에서 대현으로 가는 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길가에는 전봇대가 가로수와 함께 끊임없이 줄지어 있었다. 추수가 끝나 더 넓어 보였던 들판보다 산들이 점점 많아지고, 낮았던 산들은 점점 높아지며, 길을 감싸는 골짜기는 점점 좁아져서 무언가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우리나라 장애인복지에서 획기적인 전환기가 되었던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그 해 늦가을 나는 그 길을 그렇게 가고 있었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이라 했는데, 산이 하도 높고 골도 워낙 깊어 가슴이 답답해 질 무렵 도착한 비탈진 산등성이 위의 광산사택은 이삿짐 차도 오르지 못했다.

이삿짐을 옮길 걱정에 멍하게 비탈진 경사위의 사택을 바라만 보고 있는 내게 이삿짐 차 기사는 이렇게 말했다. “어찌 이런 곳까지 오시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힘내서 살아 보세요” 그 격려의 말이 얼마나 슬픈 말이었는지 그때는 몰랐다.

두 번째 길.

골이 깊어 더욱 아름답게 단풍이 들었던 3년 뒤 1991년 가을에 나는 그 길을 되돌아 나오고 있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인적이 드물어 깊은 밤이 아님에도 적막하기만 한 그 길을 응급차에 실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삶을 찾아 달리고 있었다.

차에 함께 탔던 회사부속병원의사도, 회사직원들도, 가족도 모두 혹시라도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사망할지도 모르는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귀청을 때리는 응급차소리와 곡선도로를 달릴 때마다 몸이 흔들려 느끼는 죽음 같은 통증 속에서 나는 내가 죽음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인지, 혹은 삶의 길로 가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이 죽음보다 더 한 통증과 점점 멀어지는 의식과 싸우고 있었다.

세 번째 길.

그리고 20년이 훌쩍 지난 2011년 겨울날 나는 그 길을 또 가고 있었다. 들판은 흰 눈밭이고 길가 소나무는 아름답게 눈꽃이 피웠다. 들판이 좁아지고, 골이 깊어지고, 산이 높아져도 나는 더 이상 슬프거나 외롭지 않았다.

내 입은 차량 오디오에서 나오는 ‘나는 가수다’의 음악을 따라 부르고 있었고, 내 옆에는 함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웃고 있는 아내가 있었다. 우리는 이십년 전 지옥 같던 그 길을 따라 나는 처가에 아내는 친정에 가고 있었다.

이삿짐 차 조수석에서 깊어지는 골짜기를 보며 한숨을 쉬던 길,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죽음과 다투며 응급차에 실러 나오던 그 길이었는데, 나의 한손은 핸드컨트롤을 잡고 한손은 핸들을 잡고 한 학기를 잘 마친 흡족한 마음에 마치 개선장군처럼 그 길을 달리고 있었다.

상주, 문경, 영주, 봉화, 태백을 지나 백두대간을 넘은 뒤 삼척의 가곡의 처가로 가고 있었다.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그 때는 이 시를 읽으면서 시골길의 갈림길만 생각 했고, 인생의 갈림길은 생각해보지 못했다.

우리는 많은 갈림길에서 한 길을 선택해야 한다.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를 진학할 때도 이후 직업과 결혼 등 인생길은 그 갈림길에서 선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많이도 달라진다.

중도장애인의 길은 이러한 갈림길에서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선택되어진 길이다. 그 원인이 질병이거나 사고이거나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혹은 우리는 정말로 피하고 싶었지만 우리에게 찾아온 장애라는 이 굴레, 혹은 절대 반갑지 않은 손님을 우리 중도장애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또 그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그리고 초기 선택을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이후 그 중도장애인의 삶은 참 많이도 바뀌게 된다.

대전엑스포가 한창이던 1993년 봄에 병원직원의 부탁으로 재활수기를 쓰고 있었다. 그 당시 이제 막 응급치료가 끝나 재활치료 중이었던 시기였기에 수기를 쓰면서 장애인이 된 내 인생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볼 기회가 있었다.

그 때 썼던 재활수기의 제목이 “세 번째 인생” 이었다. 첫 번째 인생은 사고로 장애인이 되기 이전의 인생이고, 두 번째는 장애인으로 살고 있는 인생, 세 번째는 치료이후의 삶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때는 척수손상이 치료가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치료가 끝나면 다시 원상복귀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던 시기였으며, 내 장애를 수용하지 못하고 부정하던 시기였다.

그 이후 내 삶을 되돌아보면, 결국 지금이 세 번째 삶이 된다. 비장애인으로 살았던 시기 30여년, 장애인으로 방황하던 시기 10여년, 이후 장애인관련단체 등의 활동을 하며 살아온 10여년, 결국 나는 내가 수기에 썼던 세 번째 인생은 척수마비가 치료가 되어 비장애인으로 사는 삶이 아닌, 장애를 가지고 열심히 도전하며 사는 삶이 된 것이다.

이번학기에도 재활공학과 1학년 학부 학생들의 강의를 맡았다. 그 학생들에게 장애인에게 재활공학이 어떤 의미인지 알려주고 싶어서 고민하다가 다시 읽고 있는 책이 서울대 이상묵교수의 ‘0.1 그램의 희망’이다.

나는 사고 이후 오랜 방황을 한 끝에, 자살시도, 이혼과 가정파괴 등 어쩌면 우리나라 중도장애인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겪고 나서야 내 장애를 수용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반대로 이상목교수는 사고 이후 6개월 만에 다시 강의를 했다는 사실에 놀랍기도 하고, 방황만 오래한 내가 부끄럽기도 하다.

에이블뉴스와의 인연은 이 땅에 장애인 모두가 그렇듯이 장애계소식을 접하기 위해서 찾기 시작했고 더 가까운 인연은 2010년 아내가 우리 결혼이야기를 쓰면서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아내가 글을 쓰다가 자신은 비장애인입장에서 장애인과 결혼한 이야기를 썼으니 나는 장애인관점에서 결혼이야기를 써보자 해서 마지막 한 페이지를 쓰게 되면서 내가 공부하고 있는 분야가 재활학이니 나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이런 칼럼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왔다.

아직 박사과정공부가 끝나지 않은 상태이고 올해가 과정 마지막해인지라 망설여지기는 했었지만 그냥 중도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들, 장애인으로 살아오면서 겪어온 일들, 장애인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야기, 장애인의결혼생활이야기 등의 일상이야기와 장애수용, 동기부여, 장애인의 역량강화, 재활학 등의 조금은 전문적인 이야기를 써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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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도7단의 검도관장 민솔희와 척수장애1급의 박종균. 결혼이야기는 민(양)박(군)집 러브 스토리로 이미 알려졌다. 지금은 천안 나사렛대학교에서 더 많은 장애인들과의 희망 이야기를 꿈꾸며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강의를 하고 있다. 장애인여행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장애인체육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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