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넘어 겨울로 가는 시즌이다.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단풍이 환경미화원들의 빗자루 소리와 함께 사라지고 나면,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케럴과 함께 구세군 자선남비의 종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갑자기 생겨난 풍경이겠는가? 매년 겨울마다 볼 수 있는 것들이지만, 각 사람이 처해 있는 환경과 마음에 따라 이것들을 바라보는 눈길 역시 다를 것이다. 햇살이 아무리 밝아도 누군가에게는 처량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처럼.

그녀는 "너의 집착때문에 내가 떠난다" 는 말을 남기고 애인이 아닌 동갑내기 친구로 돌아갔다. 집착때문에 떠난다는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생각해 주면 안 되겠니?" 라고 붙잡을 수 없는 것이 마음 아팠지만, 떠나는 사람이나 떠나온 사람 모두에게 상처가 남는 일이기에 그녀를 보내야 했다.

처음에는 더 이상 그녀에게 전화를 하거나 만날 수 없다는 점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내 곁엔 친구들조차 없다는 점을 이별보다 더욱 뼈저리게 인식해야만 했다.

사실 그녀를 만나기 시작한 이후부터 친구들과의 연락이나 만남에 소홀했던 것이 문제였다. 사랑은 떠나면 다시 만날 수 있지만 친구를 잃으면 다시 만나기 어렵다는 사실을 그 때는 생각하지 못했다.

친구들과의 약속과 여자친구와의 약속이 겹치는 경우, 항상 우선순위는 그녀였다. 사랑 못지않게 친구도 중요했던 시기였지만, "장애를 가진 내가 친구는 다시 만날 수 있더라도 비장애인 여자친구는 만나기 힘들다" 는 생각이 항상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구들과도 연락이 뜸해지거나 멀어지게 되었다. 한 번은 휴대전화를 잃어버리면서 그나마 연락을 하고 지내던 친구들의 전화번호까지 기억나지 않게 되었다.

학교생활을 제외한 모든 포인트를 이성교제에 맞추다 보니, "내가 이렇게까지 그녀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데, 여자친구가 다른 사람을 만나면 어떡하지" 라는 조바심을 갖게 만든 원인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친구들과의 만남을 포기하면서까지 여자친구에게 집중했지만,, 이별 후에 남는 것은 친구들의 위로가 아닌 "이젠 내 옆에 친구들도 없다"는 후회와 허전한 마음 뿐이었다.

그녀는 나와 만남을 이어가는 중에도 때때로 친구들을 만나거나 데이트 중에도 친구가 다치거나 하는 등의 일이 생기면 양해를 구하고 직접 달려가거나 오랫동안 전화 통화를 할 만큼 동성 친구들과의 연락에도 적극적이었다. 내가 그녀의 절반 정도라도 데이트와 함께 동성 친구들과의 만남에 집중했다면 이별을 견디기가 훨씬 쉬웠을 것이다.

그녀와의 만남이 끝난 이후에 예전에 연락을 하지 못했던 친구들과 전화 통화를 시도했지만 반응은 냉담했고, 그들과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가수 전영록 씨의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라는 노래를 듣다 보면 "처음부터 너무 진한 잉크로 사랑을 쓴다면, 지우기가 너무너무 어렵잖아요.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라는 부분이 있다.

장애를 가진 몸으로 이성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고 해서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너무 진한 잉크로 사랑을 써내려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옆에 있는 상대에 충실하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역시 평상시와 같이 유지해야 혹시나 모를 이별앞에서도 위로를 받을 수 있고, 또 다른 사랑을 기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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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석 칼럼니스트 집에서만 살다가 43년 만에 독립된 공간을 얻었다. 새콤달콤한 이야기보다 자취방을 얻기 위한 과정에서 겪었던 갈등들과 그것들이 해결되는 과정이 주로 담으려 한다. 따지고 보면 자취를 결심하기 전까지 나는 두려웠고, 가족들은 걱정이었으며, 독립 후에도 그러한 걱정들은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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