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교재를 이어갈 당시에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친구들이 적지 않았다. 매일 수많은 손님들을 상대하며 때로는 진상 고객들 때문에 속을 썩는다는 애기를 많이 들었지만, 그 중에서도 재미있었던 것은 다른 편의점에 갔을 때 그 곳의 매장 환경이나 물건 진열 상태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는 이야기였다.

단순히 물건을 사고 나가는 손님이 아닌 직원으로서 둘러보는 편의점의 느낌은 보통 사람들의 그것과 많이 틀렸을 것이다.

그녀가 다니던 교회에서 지체, 뇌변변 장애인들이 생활하는 시설에 가게 되었을 때 여자 친구와 함께 그 곳에 동행했던 때도 마찬가지였다.

몸이 불편한 생활인들이 힘들게 밥을 먹거나 애써 밝은 모습을 보이려고 하는 모습들을 본 다른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지만, 오히려 같은 장애인인 나는 무덤담하기만 했다. 그들이 손을 잘 움직이지 못하거나 엎드려 식사를 하는 것은 각자의 장애에 따른 특성이지 눈물을 흘릴 만큼 불쌍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정말 '불쌍한' 이유는 장애가 아니라 다른 곳에 있었다.

그녀와 함께 시설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1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평일에는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생활인 대부분이 시설 내에 마련된 작업장에서 일을 한다고 들었기에 편안히 쉬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줄 알았다. 하지만 정작 생활인들이 거주한다는 방에서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기가 어려웠다. 휴일 아침에 다들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니 예배실에 있단다.

함께 예배실에 들어가려 했으나 장소가 좁아 모두가 들어오기는 힘들다는 말에 그 주변을 잠시 산책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걸어서 5분 거리에 중학교가 있기는 했으나 차량이 지나다니는 것을 보기가 어려웠고, 휴일 아침이라는 것을 고려해도 주변은 한가하기만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원장은 예배가 끝나면 모두가 식당으로 이동한다며 그 곳으로 갈 것을 권했다. 신발을 신지 않거나 휠체어를 타고 있다고 해서 접근에 전혀 문제가 없을만큼 접근성은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었지만, 황당하다고 느꼈던 것은 생활인들의 식단이었다.

밥, 국, 반찬 2-3 가지를 기본으로 먹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나 그들 앞에 놓여진 음식은 밥이 이미 들어가 있는 국, 그리고 김치 한 가지가 전부였다.

일반적인 가정에서라면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가 심각하게 아프거나, 무척 바쁜 일이 있을 때 먹는 식단보다도 부실했지만 그들은 "오늘은 어제보다 김치가 좀 많아서 좋다"며 이미 거기에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에 걸친 식사가 끝나고 생활인들이 머물고 있는 방에 들어왔지만, 그녀와 나는 배가 고팠다. 함께 간 다른 일행들은 특별한 애기 없이 식사를 끝냈지만 집과 밖에서의 식사에 길들여진 우리 커풀은 식사가 입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고민 끝에 우리는 비상 식량으로 갖고 온 소형 피자 한 판을 꺼냈다.

그런데 피자를 본 생활인들이 "그 피자 좀 우리에게 줄 수 있느냐" 고 물어왔다. 마침 함께 온 일행들은 "또래끼리 있으면 애기가 통하지 않겠느냐"며 우리 커풀을 따로 20-30대 생활인들과 붙여 놓았기에 어른들도 없었고, 우리는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당황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새 피자도 아닌 어제 저녁에 주문해서 딱딱하게 굳은 피자를 주는 것도 예의는 아니었다.

"저기, 여기 계신 분들이 모두 드실 수 있도록 (피자를) 배달시켜 드릴께요"

우리는 잠시 애기를 나눈 끝에 생활인들의 인원 수에 맞추어 피자를 배달시키기로 했다. 피자 2판 정도면 어느 정도 먹을 수 있는 인원들이 방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밖에서 시키면 선생님에게 혼날지도 몰라요. 여기에 전자렌지가 있으니까 데워 먹으면 되요.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이 시켜주는 피자도 마음 놓고 먹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가만히 있는 우리들을 놓아 두고 그들은 이미 식어빠진 피자를 다시 덥혀 방으로 가져와 참 맛있게도 먹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그들은 "청년부 예배를 드리러 가야 한다"며 다시 우르르 방을 빠져나갔고, 우리 역시 내일을 위해 다시 버스에 올라타고 그 곳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 글을 쓰며 그들의 모습을 생각하니 몇 년 전 고등학생 신분으로 종교의 자유를 외쳤던 강의석 군이 떠오른다.

세상은 학생들도 종교의 자유를 외칠 만큼 변하고 있는데 생활 시설의 20-30 대 청년들은 쉬고 싶고, 자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지도 못하고 예배를 보러 가야 한다.

장애인들은 세상에서 제멋대로 살기 위해 탈 시설화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시설이 그들의 미래를 위해 교육과 투자를 하는 곳이 아니기에, 세상에 나와 하나하나 부딪히며 배우고 싶어서 시설에서 나오려 하는 것이다.

자기 멋대로 하는 것이 아닌, 상황에 맞게 판단하며 남의 이익과 자신의 이익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자유이다,

지금 생활인들 중에는 어떻게 상황에 맞게 판단해야 하는지, 어떤 것이 자신과 다른 사람 모두의 이익을 함께 지킬 수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 드믈다. 장애이기 때문에 정신연령이 낮아서가 아니라, 스스로 의사 결정을할 수 있는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똑같은 장애를 가졌으면서도 중도에 장애를 입은 사람은 선천적 장애인에 비해 재활에 훨씬 적극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선천적 장애를 입은 사람은 장애가 주는 불편함을 모르고 그 속에 익숙해져 있으나, 건강하게 살다가 장애를 입은 사람은 장애를 입은 후에 겪는 불편함을 직시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설에 있는 것이 정말로 불편하고 힘들다면 진작에 탈 시설화 요구를 하지 왜 이제 와서 요구를 하느냐는 이야기도 있었다.

예전에는 장애를 가진 사람의 대다수가 집 안에 있다가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현실이었지만 지금은 각종 언론을 통해 장애를 입고도 지역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심심찮게 접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시설에서도 텔레비전과 인터넷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장애를 입고도 지역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보며 시설 장애인들은 자신이 얼마나 억눌리며 부당하게 살아왔는지 최근에야 느끼게 된 것이다.

장애인들이 '오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역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고 나면 피자 한 판에 눈치를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장애 속에서도 살아가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탈 시설회를 외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불만이 있다면 "텔레비전과 인터넷 라디오에 장애인들이 사회 속에서 사는 모습을 보여주지 말라"는 항의를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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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석 칼럼니스트 집에서만 살다가 43년 만에 독립된 공간을 얻었다. 새콤달콤한 이야기보다 자취방을 얻기 위한 과정에서 겪었던 갈등들과 그것들이 해결되는 과정이 주로 담으려 한다. 따지고 보면 자취를 결심하기 전까지 나는 두려웠고, 가족들은 걱정이었으며, 독립 후에도 그러한 걱정들은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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