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디시 거리 풍경. ⓒ샘

2004년 5월 24일, 이곳에 온지 이틀째를 맞는다. 많이 익숙해 졌다. 시장도, 거리도, 사람들도. 이곳에 오기 전에 그렇게 많았던 걱정들이 이틀을 지나면서 웬만큼 사라졌다. 사람은 적응하며 살게 되어있다는 말이 장애인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처럼 통념화되어 있으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 현실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기쁘고 흐뭇하다. 내가 이렇게 가족을 떠나서 살 수 있다니…….

5월 25일에는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다. 오리엔테이션은 스폰서 소개와 성공적인 인턴을 위한 교육이었다. 상원과 백악관 등에서 사람들이 나와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 강한 억양은 아니었지만 상당히 분위기를 압도해 교육 내내 긴장감이 느껴졌다.

이곳은 캘리포니아보다 세시간이 빠르다. 그 시간차 때문에 점심 식사 후에는 잠이 쏟아졌지만 억지로 참아가며 강연을 들었다. 여덟 시간 동안 이어진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있었다.

그냥 쓰러져 자고 싶었지만 이틀 동안 음식이며 설거지를 도맡아서 한 룸메이트에게 미안해서 오늘은 밥이며 반찬을 내가 다 만들었다. 햇반만 먹었었는데 처음으로 쌀밥을 해 먹으니까 무척 맛이 있었다. 설거지까지 내가 다 하고 한 동안 누워있었더니 피곤이 많이 풀렸다. 옆에서 잠든 룸메이트에게 다소 미안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이 시간을 놓치면 글쓰기가 힘들 것 같아 노트북을 켰다.

하루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기숙사 앞에서 모여 함께 전철역까지 걸어 가던 일, 미어지게 복잡한 전철을 타던 일, 시각장애인들이 둘씩이나 내 휠체어에 매달려 끌고 가던 일, 영화에서나 보던 호화로운 회의장에서 강연을 듣던 일들.

특히 인상 깊었던 일은 내가 휠체어로 들어서자 회장이 내게 자리를 내어 주고 다른 자리에 가서 앉았다. 내가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했더니 당신 마음이지만 가능하면 인턴들은 회의 석상에 앉아야 된다며 기어코 물러났다. 장애인이 들어섰다고 회장이 자리를 내주다니…….

상원의 인턴은 AAPD에서 추진하고 있다. 전국에서 소수의 우수한 장애인들을 선발해 상원으로 보내 정치와 정책 등을 배우게 해 능력있는 정치가로 키우는 것이 단체의 목적이다.

Finalist가 60 명이었고, 그 중에 전화 인터뷰를 통해 열 명을 선발한 것이다. 열 명 중 아홉 명이 백인이고 나만 외국인이었다. 정치에 있어서는 아직도 백인이 상당히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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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급 지체장애인으로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 사회학과를 졸업, 미국 탐 하킨 상원의원 장애국 인턴을 역임했다. 또한 서울장애인체육회 워싱턴 통신원, 서울복지재단 워싱턴 통신원,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했다. 출간한 수필집 ‘사랑, 그 빛나는 조각들’은 1992년 올해의 우수도서로 선정됐으며, 2009년에는 워싱턴 문학 수필부문 가작에 당선됐다. 각종 미국 장애인 소식을 전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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