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에서 내려 공항 출구로 가는 셔틀 버스 안에서. ⓒ샘

2004년 5월 22일, 아침 일찍 졸업식이 있었다.

공부 열심히 한 흔적으로 남아있는 금색의 휘장과 금메달, 코드들을 목에 두르고 하는 졸업식이어서 유난히 기뻤다. 아직 두 과목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그다지 힘든 과목들이 아닌데다 유닛도 크지 않아 부담이 적어 실질적으로 졸업한 거나 마찬 가지였다.

먼저는 하나님께 감사했다. 또한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기까지 무엇보다도 큰 수고를 한 아내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지난 학기, 얼마나 힘들고 조마조마한 시간이 많았던가. 도저히 해내기 힘든 순간순간을 하나님이 빠짐없어 무사히 건너게 해 주셔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상원 인턴을 위해 밤 비행기를 타고 워싱턴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졸업 파티며, 졸업 여행 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는지. 그렇게 힘들게 공부를 마치고 이 좋은 대학 영광스럽게 졸업했는데 가까운 사람들과 식사 한 끼 함께 하지 못하다니. 그러나 어쩌랴, 나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워싱턴행 준비를 했다.

휠체어를 조립하려면 아홉 시까지 공항에 나오라고 해서 일곱 시가 좀 지나서 집을 나섰다. 그런데, 전철이 생각보다 늦게 도착한데다 공항에서 항공사를 찾는데 시간이 걸려 열 시가 넘어서 도착했다. 나를 전송 나온 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뛰어댔는지.

너무 급해서 차분한 인사도 못 나누고 정신없이 공항으로 들어갔다. 처음으로 혼자 타는 비행기였다. 철저한 검색을 마친 후에 대기실에 도착하니 열 시 반. 아직 30분 넘게 시간이 남아있었다. 그럴 줄 알았으면 여유있게 인사라도 하고 나오는 건데. 그러면 눈물 날까 봐 하나님께서 급하게 몰아 넣으신 모양이다.

비행기 안에서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밤에, 그곳도 혼자 타서 그런지 심란했고, 가끔씩 흔들리는 비행기는 잠시 잠시 선잠만 자게 만들었다. 시간차 때문에 몇 시간 지나자 해가 솟고 있었다. 햇빛을 보며 공항에서 내리니 아침 일곱시 15분, 승무원들의 조작 미숙으로 휠체어가 고장이 나 있어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아홉 시까지 밴이 나오기로 되어있었다. 시간을 넘기면 엄청난 비용을 물게 되는 데다 다시 예약을 하려면 하루가 소요되는데, 그렇게 됐다가는 문제가 보통 심각해 지는 것이 아니었다.

조바심하고 있는 사이에 휠체어가 고쳐졌고 급히 짐을 챙겨가지고 나가니 아홉 시 십분 전이었다. 시간이 되어 밴에 올랐다. 어제 오늘 정말로 정신 없이 보냈다.

날씨는 무척 더웠다. 하지만 오랜만에 맛보는 한국의 여름과 비슷한 후끈한 날씨가 얼마나 좋던지.

조지워싱턴대학에 도착해 짐을 내렸다. 건물은 다소 낡았지만 내부는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혼자 살아야 하는 내가 가장 염려했던 점은 화장실의 변기 높이와 침대의 높이였다.

장애인용으로 지어진 화장실 변기는 대부분 높다. 휠체어 시트까지 감안해서 만들어 졌기 때문이다. 두툼한 방석을 쓰지 않는 내게는 맞지 않는다. 또한 미국의 많은 침대들은 상당히 높다. 아래에 떠도는 먼지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게 높아서 올라가기 힘든 경우가 많아 나는 급히 화장실과 침대를 체크해 보았다. 변기와 침대가 내 휠체어 높이에 자로 잰 듯이 맞았다. 살았다.

만사를 제쳐 놓고 깊은 잠에 골아 떨어졌다. 깨어나 보니 정신이 한결 맑았다.

공항에서 밴을 기다리며. ⓒ샘

공항을 나오며. ⓒ샘

내가 머물게 될 조지워싱턴대학.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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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급 지체장애인으로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 사회학과를 졸업, 미국 탐 하킨 상원의원 장애국 인턴을 역임했다. 또한 서울장애인체육회 워싱턴 통신원, 서울복지재단 워싱턴 통신원,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했다. 출간한 수필집 ‘사랑, 그 빛나는 조각들’은 1992년 올해의 우수도서로 선정됐으며, 2009년에는 워싱턴 문학 수필부문 가작에 당선됐다. 각종 미국 장애인 소식을 전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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