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덩어리인 삶을 살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후회되는 것은 처음으로 사귀었던 여자친구와 이별했을 때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처음으로 이성 친구를 사귀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내가 무슨 여자친구를 사귀냐”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지냈다.

누나들 틈에서 성장했던 터라 수줍음이 많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내 자신의 장애가 이성 친구를 만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여기고, “장애와 비장애를 떠나, 내가 여자 친구를 사귀는 것은 부산에 눈이 오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로 생각했다.

그러던 와중에 비장애인인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었으니 하늘이 날아갈 듯한 기분을 느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처럼 몸이 불편한 사람을 선택해 주었다는 고마움에 처음 몇 달 동안은 “어떻게 하면 내가 몸이 불편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지 않게 할까”를 고민하며 지냈다.

버스 안에서 누가 자리 양보를 해도 “나는 건강한 사람”이라며 거절하는 것은 물론, 나중을 생각해 장애인등록을 하라는 충고를 “복지카드를 만들어도 건강해지면 다시 반납할 텐데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처럼” 보이게 하려는 생각과는 달리, 현실에서 부딪히는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해 내 속은 조금씩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대학에 들어간 지 한 달이 채 안 되었던 터라 고등학교 때와는 다른 수업 방식, 곳곳이 계단인 캠퍼스, 대인관계의 어려움 등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속이 편하지 않았던 것이다.

때로는 “상담을 받아볼까”라는 생각이 들 만큼 스트레스가 심했다. 여자친구에게도 이 사실을 털어놓았지만, “처음에는 씩씩하던 애가 갑자기 왜 그러느냐”는 말을 들은 후로는 한번도 학교생활의 어려움을 털어놓지 않았다.

당시의 나는 어려운 상황이 생기면 정면돌파나 해결책을 찾기 보다는 가능하면 피하는 성격이었다. 때문에 데이트 할 때 마다 “얼굴이 피곤해 보인다”는 말을 들어도 “그냥 좀 아파서 그래”라는 말로 무마시키며 지냈다.

그렇게 4개월 정도 지났을까? 우리들 사이는 점점 거리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었던 데 비해, 그녀는 학교를 일찍 졸업하고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였다.

고등학교와는 많이 다른 곳이 대학이고, 장애 학생들이 겪는 어려움이 크다고 하지만 그래도 사회 초년생들이 직장 생활에서 겪는 여러 가지 문제들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서로가 가지고 있는 고민거리가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학교생활이 조금 익숙해지자 진로 걱정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던 나는 여자친구가 “너는 항상 피곤해 보인다”는 말을 해도 “네가 내 입장이 되어 보면 그런 소리가 안 나올 거다”라는 말로 받아치는 경우가 많았고, 그녀 역시 “남자친구가 자기 입장도 모른다”면서 화를 내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너는 항상 피곤해 보인다”고 애기했던 여자친구의 속마음은 “너는 장애 때문에 힘들지만, 나도 회사 생활이 힘들다 내 고민도 좀 들어 달라”는 일종의 시위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너무 어렸다. 나 또한 ‘나의 장애가 가장 큰 고민’이라고, ‘장애만 없으면 뭐든 잘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서로가 만나도 즐겁지 않은 시간이 계속되고 얼마 후, 그녀가 먼저 이별을 통보했고 “차라리 속 시원하다”는 생각으로 이별을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그녀가 “나는 너를 장애인이라고 생각하고 사귄 것은 아니었는데 이제 그만 헤어지자”고 얘기한 날 알게 됐다. 자신이 회사 생활로 인해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지, 자신의 마음을 몰라준 내게 서운한 마음이 있었는지….

헤어진 후 조금 시간이 지나자, 오래 전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후유증에 시달리는 환자처럼 마음속에 후회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비장애인처럼 보이기 위해 자신을 포장할 필요 없이 솔직히 얘기하고 고비 때마다 조언을 구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면 나도 내 마음의 고민을 풀어놓고 여자친구에게도 좀 더 다정히 대할 수 있었는데…”

오랜 동안 후회를 하고 지냈고, 그 후로는 내 자신의 고충을 얘기하는 것이 오히려 상대방에게는 스트레스를 덜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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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석 칼럼니스트 집에서만 살다가 43년 만에 독립된 공간을 얻었다. 새콤달콤한 이야기보다 자취방을 얻기 위한 과정에서 겪었던 갈등들과 그것들이 해결되는 과정이 주로 담으려 한다. 따지고 보면 자취를 결심하기 전까지 나는 두려웠고, 가족들은 걱정이었으며, 독립 후에도 그러한 걱정들은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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