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극단 휠 2010년 하반기 정기공연 '춤추는 휠체어' 공연 장면. ⓒ 장애인문화예술극회 휠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유유히 호수를 노니는 백조의 비유. 수면 위 여유로운 움직임을 위해 보이지 않는 백조의 두 발은 쉼없이 버둥대고 있다. 나는 백조의 비유에서 공연 직전 분장실의 모습을 생각한다. 1시간 반의 멋진 공연을 위해 무대 뒤 분장실은 그 어느 때보다 바쁘고 분주하다.

분장을 고치고, 의상과 소품을 점검하고, 실수하지 않도록 몸과 입을 풀고, 상황에 따라 시시때때로 바뀌는 동선을 체크하고, 긴장을 풀기 위해 배우들은 서로 수다를 떨기도 한다.

첫공연은 정신없던 분장실을 나서며 시작되었다. 첫공연 때 초보 배우들은 긴장 때문에 많은 실수를 한다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연습실에서의 연습이나 리허설 같은 느낌이었다. 무대의 강한 조명에 비해 객석이 어두워, 무대 너머 관객의 시선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를 관찰하는 타인의 시선, 연습실 거울을 통해 보이던 나의 시선 모두로부터 자유로웠다. 무대에서 내려오자 연출 선생님과 선배 배우분들이 첫공연을 한 느낌이 어떠냐고 물어보았는데, “아무 느낌도 없다”고 대답했다. 모두들 갸우뚱했다.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주말에 두 번씩 공연을 하는 정기공연의 장점은 매일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는 점이다. 어느날인가 할아버지 역할을 맡았던 배우의 콧수염이 떨어져 크게 웃은 적도 있고, 소품을 챙기지 못해 당황하기도 했고, 무대에서 넘어지기도 했고, 그에 따른 관객들의 반응도 매일 달라졌다.

주인공이 빛나야 연극 자체가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생각해, 나는 하루하루 더 나아지려고 노력했다. 배우 선생님들은 처음에 비해 연기가 가장 많이 나아진 것은 루이즈라고 칭찬하셨다. 나는 다른 배우들과 다르게 연기 경험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처음보다 많이 나아질 수밖에 없었지만, 매일매일 변화하는 내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 행복했다.

나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늘 서툴렀는데, 무대에서 기쁠 때 화가 날 때 전보다 감정을 더 잘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표정이 다양해졌다는 칭찬도 들었다. 다만 여전히 울 수 없었다. 피겨스케이트였던 루이즈는 사고 이후로 휠체어 장애인이 되고, 사회적 은둔자로 마음의 문을 닫고 있었다.

극의 초반 자신과 세상을 향해 서있는 날카로운 날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감정을 폭발시켜 우는 것이 필요했다. 공연 중반 이후 내 목표는 ‘무대에서 한 번이라도 크게 울기’였다.

연극의 주인공으로 무대에 올랐던 나, 인생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믿는다. ⓒ 장애인문화예술극회 휠

공연 15분전 나는 무대 위 검은 막 뒤에 혼자 숨어 감정을 잡으려고 애를 썼다. 억지눈물이라도 끌어내고 싶었다. 돌아가신 할머니, 키우던 고양이가 죽던 날, 헤어진 남자친구, 연습실에서 호되게 혼나고 화장실에서 혼자 울던 기억. 무대 뒤에서 갖가지 슬픈 감정들을 끌어올려내고, 조명이 들어오면 무대에 올랐다.

‘거짓감정’들이 때때로 효과를 발휘해 감정이 잡혀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순간이 몇 번이나 있었다. 하지만 눈물이 나오려는 찰나, 객석 어딘가에서 문영민의 시선이 루이즈를 응시하는 것 같았다. “울지마, 크게 울면 어색해.” “입을 가려, 추해보여.” 어두운 객석의 시선도 보이지 않고, 나를 ‘직접’ 응시하는 거울도 없는 곳이었지만 여전히 제3자로 나를 바라보는 내 시선을 의식했다.

마지막 공연 D-7, D-6, D-5 … 막바지가 되니 조급해졌다.

“이제야 널 볼 용기가 생겼어. 그동안 사실 나 널 미워했었어. … 좀 더 실력있는 파트너를 만났더라면 넌 마음껏 달리고 있었을텐데. 미안해, 이젠 널 보내줄게. 비록 이제 우리 함께 할 순 없지만 넌 더 열심히 달려줘. … 고마워. 내 사랑, 내 꿈, 내 추억아.” 루이즈는 마지막 씬에서 자신을 다치게 했던, 그래서 그동안 미워할 수 밖에 없었던 ‘스케이트’와 화해한다.

마지막 공연을 몇 일 앞둔 어느 날, 스케이트를 향한 독백에 루이즈에 대한 감정이 이입됐다.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루이즈에게 미안했다. 연극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여전히 무대 위에서 완벽하게 루이즈일 수 없었다. 더 예쁘고, 연기를 잘 하는 배우를 만났더라면 더 사랑스럽고 예쁜 여주인공으로 빛났을텐데. 마지막 공연이 끝나기 전까지 꼭 루이즈와, 무엇보다 내 자신과 당당하게 마주보겠다고 약속했다.

마지막 공연, 연습을 하는 동안은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던 바로 그 날. 대학로로 가는 차 안에서도, 마지막 점검을 하는 분장실에서도, 공연 15분 동안 감정을 짜내던 검은 막 뒤에서도 아주 많이 울었다. 그리고 그렇게 울고 싶었던 첫 씬에서, 속눈썹이 떼어질 정도로 크고 슬프게 울었다.

그동한 고생했던 연습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고, 함께 고생했던 배우와 스텝분들과 헤어지는 것이 섭섭하고, 작품과 루이즈와 헤어지는 것이 슬펐다. 연출 선생님이 공연 전에 말씀하시던 말, “루이즈를 사랑하게 되는 순간, 펑펑 울 수 있을 것”이라던 그 말이 사무치게 이해됐다.

물론 마지막 공연까지 내가 여주인공으로 연기를 잘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 날만은 정말 무대 위에서 루이즈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진심으로 울고 웃었고, 진심으로 사랑을 했다. 무대 밖에서 문영민이 하지 못했던 많은 일들을 해냈다고 생각한다.

공연이 끝나고 커튼콜 장면에서 마지막 인사를 할 때 객석에서 전에 없었던 환호와 갈채가 쏟아졌다. 늘 나를 괴롭혔던 그 시선, 제3자로 연극을 싸늘하게 관망하던 문영민도 고생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줄 것 같았다.

스포트라이트가 나를 향하고, 관객들이 나를 향해 환호하고, 벅찬 가슴으로 무대에서 내려오던 그 순간! 나는 연극뿐만 아니라 내 인생에서 주인공이 되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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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화학부 04학번,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석사 진학 예정. 커피와 고양이, 책을 좋아하고 식상함과 무기력을 싫어하는 스물다섯의 귀차니스트. 다년간의 관악산 휠체어 라이딩으로 다져진 팔근육과 연약해 보이고 싶다는 욕망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지체장애인. '대중의 과학화'를 꿈꾸며 멋진 저술가가 되고 싶은 평범한 과학도. 내게는 일상인 풍경들 속에 나 역시 풍경으로 비춰질까, 부조화한 이방인으로 비춰질가 오늘도 고민-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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