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장애인 부모들은 ‘자녀보다 단 하루만 더 살았으면’ 하는 절망감을 드러내는 말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대체로 공감한다. 자립능력이 부족한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은 아무래도 본인 사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해외 부모들도 ‘자녀보다 5분만 더 살았으면 좋겠다’고 푸념을 쏟아 놓기도 한다. 장애인 복지나 자립생활 기반이 아무리 잘되어 있어도 발달장애인 부모의 짐이란 게 본인 사후에도 놓기 어려울 만큼 무겁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는 장애를 가진 딸아이의 미래를 생각하면, 부질없는 생각을 버리고 아이의 평생계획을 잘 세워 좀 더 오래 건강하게 살면서 자녀의 자립을 지원하는 게 더욱 중요하다고 믿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네 부모들이 부모운동을 통해 열심히 투쟁해서 발달장애인 자녀들에게 보다 나은 사회 환경과 복지제도를 구축해 놓을 수 있다고 믿는다.

자립생활 계획은 자녀 평생계획

최근 미국 장애인 부모 페기 모건이 쓴 <부모가 알아야 할 장애자녀 평생설계>라는 책을 보게 되었다. 다운증후군 청년의 양어머니인 모건은 자신이 죽으면 자녀가 어떻게 될까 하는 떨칠 수 없는 물음을 던지면서도 자녀의 장애와 욕구를 정확하게 파악해서 자녀를 위한 평생계획을 꼼꼼하게 세우고 차근차근 실천해나가는 모범을 보여준다.

그는 자녀의 꿈에서 출발해서 아이에게 행복한 자립적인 생활 목표를 세우고, 직업, 주거, 룸메이트, 권리옹호, 재정신탁, 변호인, 지원그룹, 장애인 인권운동, 지역공동체 세우기 등 구체적인 실천계획을 세우라고 조언한다. 12살부터는 자립생활을 위한 이행준비에 착수해야 한다며 외로움(고립)이 진짜 장애이므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한다. 발달장애인을 위한 사회적인 지지망과 자립적인 사회환경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해외 부모의 앞선 경험담을 읽으면서 장애인 자녀를 위해 한치 계획 세우기가 막막하기만 한 우리네 부모들의 현실을 돌아본다. 무엇보다도 자녀의 자립생활 준비를 위해 긴 안목으로 계획을 세우고 가정에서부터 충실히 실천해야 하는데, 과연 우리네 부모들은 자녀의 자립생활을 가정에서부터 실천하고 있는가?

자립생활의 반대말은 ‘학습된 무기력’

발달장애인들의 자립생활에 가장 큰 걸림돌이 ‘학습된 무기력’ 인데, 자립생활을 가로 막는 의존성 심화를 나타내는 말이다. 심리학자 젤릭만(Seligman)이 처음 사용한 이 용어는 발달장애인 자립생활의 본질을 알려준다. 학습된 무기력은 어떤 상황에 대해 전혀 영향력을 미칠 수 없고,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다는 반복되는 실패경험으로부터 나오는 심리적 무력감을 말한다.

학습된 무기력은 생활시설 거주 장애인들에게 가장 많이 나타나는데, 이른바 ‘시설병’이라고도 한다. 생활시설에서는 생활지도 교사의 통제 아래 단체 생활을 하게 되므로 동일한 일과시간을 강요하게 되어 본인의 욕구대로 살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잔소리와 체벌 등의 통제가 일상화되고, 밖에 나가면 길을 잃을 것을 우려하여 외출을 제한하게 되고, 퇴소할 수 없는 처지를 지속적으로 주입하게 된다. 결국 자립생활을 선택할 가능성인 퇴소 의지 마저 가로 막는다.

생활시설은 뉴스에서 자주 접하는 성폭력, 감금, 약물중독과 같은 극단적인 인권침해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다. 자립생활의 핵심이 자기결정(또는 자기선택)인데, 생활시설에서는 일상적인 자기결정권을 제한할 수 밖에 없다.

지역사회시설에서 학습되는 무기력

그렇다고 학습된 무기력이 생활시설에서만 나타나는 것일까? 공동 주거시설(공동생활가정, 단기보호시설 등)도 가정과 같은 개인적 환경이 보장되지 않으면 학습된 무기력이 똑같이 나타난다. 교사의 통제, 공동생활 여건은 생활시설과 똑같기 때문이다.

단기보호시설에 있는 이들에게서 학습된 무기력을 흔히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간단한 신변 능력이 있는데도 세면대에서 손을 스스로 씻지 않고 교사가 비누를 묻혀 씻어 주기를 기다린다. 신발을 스스로 신지 않고 신겨 주기를 기다리기도 한다. 심지어는 스스로 보행하려는 동기가 없어 교사가 등을 떠밀어야만 움직이는 아이들도 볼 수 있다.

공동생활 가정과 단기보호센터는 지역사회시설로 분류되지만, 자립생활 지원이 없는 단순 보호시설이다. 그래서 정부도 생활시설과 다를 바 없는 거주시설로 파악하고 생활시설에 준하여 소규모 거주시설로 편입하겠다는 계획을 공공연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가정에서도 학습되는 무기력

학습된 무기력이 가정에서도 흔하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닫는 부모들은 아주 적다. 발달장애인은 반복적인 실패 경험에 노출되기 쉬우며, 이로 인한 두려움이 모든 상황을 회피하게 만들어 아동기부터 학습된 무기력에 빠지기도 한다.

가정 안에서 학습된 무기력은 무엇보다도 장애인 자녀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거나 늘 어린 아이로 취급하는 동정적인 생각 때문에 나온다. 부모가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는 ‘과잉보호’ 는 자녀의 자기결정 기회를 박탈하고 무기력한 의존성을 낳는다. 그리고 발달 수준에 맞지 않는 과도한 학습이나 재활치료 때문에 오히려 실패 경험 만을 반복하게 되고 학습된 무기력을 가져오기도 한다.

게다가 힘들고 불편하다고 해서 부모가 먼저 사람들을 회피할 때, 장애자녀는 다른 사람들과 접촉할 기회를 잃고 만다. 개별적 지원이 부족하고 통제만 있는 학교환경을 바꿔내지 못할 때, 장애자녀에게 무기력을 학습하는 환경을 제공하는 셈이다.

부모들은 자녀가 생활하는 가정과 학교, 지역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학습된 무기력을 없애고 자립 역량을 강화하는 것인지 매일 매일 계획을 세우고 실천해야 한다. ‘자립생활이란게 언젠가는 자녀를 집에서 떠나 보내야 하는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에서 제발 벗어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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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 중학생 딸을 둔 아버지 활동가입니다. 아이들 돌보고 살림도 챙기는 주부이기도 합니다. 2003년 부모활동가로서 장애인교육권연대, 함께가는서울장애인부모회를 조직하였고, 장애인활동가들과 함께 진보정당 장애인위원회를 건설하는데 참여했습니다. 오마이뉴스 <장애어린이 희망찾기>, 위드뉴스 <새로운 부모운동을 위한 전국순회> 라는 연재 글을 썼고, 2007년 한신대에서 <한국사회 장애인 부모운동 연구> 이라는 논문을 썼습니다. 현재 함께가는서울장애인부모회 정책국장과 발달장애인자립지원센터 소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서울장애인교육권연대,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조례운동본부 집행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장애인 부모운동과 가족지원, 발달장애인의 자립과 해방에 관심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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