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후 8개월이 된 아이가 아팠다. 울지 않고 계속해 잠들어 있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병원에 데려가니 아이의 척추에 혹이 생겼다고 했다. 의사는 사흘이 고비라고 했고, 혹시 고비를 넘기더라도 혹이 신경을 누르고 있어 앞으로 아이는 걷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제전화도 쉽게 쓰지 못하던 때에 아이의 아빠는 돈을 벌기 위해 중동에 나가있어 연락이 쉽지 않았고, 친정은 강원도 산골이었다.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 없었던 그녀는, 신에게 매달렸다.

그녀는 나의 어머니이다. 어머니에게 내 장애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일종의 금기이다. 내가 어떻게 장애를 가지게 되었는지, 치료할 수는 없었던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 병원에서의 삶은 어떠했는지 어머니는 내게 어떠한 것도 말씀해주지 않으신다. 잠결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누시던 흐릿한 대화를 통해 재구성해본 그 시점의 일들은, 떠올릴 때마다 심장 한 구석을 저릿하게 한다. 고작 내 나이 또래였던 어머니가 느꼈을 외로움과 절망, 그것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나는 그녀에게 유일하게 의지처가 되는 신앙이 있었다는 사실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한다.

과학적 회의주의자를 자처하는 마이클 셔머는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통해, 사람들이 종교와 미신, 사이비 과학을 믿게 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그것은 ‘희망’ 때문이다. 인간은 언제나 더 나은 수준의 행복과 만족을 찾아 앞날을 내다보는 종이기 때문에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비현실적인' 약속들을 붙들려고 한다. 하지만 셔머는 이러한 비현실적인 희망을 경계한다. 비현실적인 희망들에 종속될 때 지금 삶에서 가진 소중한 것들을 놓쳐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종류의 희망을 제안한다. 지금 함께 하는 사람들과의 사랑과 연대, 과학과 이성이 가져오는 희망이 그것이다.

나 역시 그러한 희망을 지향한다. 나는 내세를 꿈꾸며 지금 현재의 희망들을 놓치고 싶지 않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내게 등지더라도 늘 내 편이 되어줄 나의 가족. 가까운 친구와 동료들의 아낌없는 연대와 지지. 내 옆에서 숨 쉬고 있는 연인의 심장 소리. 내게 의지가 되고 희망이 되어주는 것은 신 그리고 그가 제공할 내세의 삶이 아니라 지금, 현재, 내 곁에서 함께 하는 사람들과의 건강한 관계이다.

물론 이러한 희망은 나를 있게 한 어머니와 그녀의 신앙을 모독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십오 년 전 내가 어머니의 상황에 있었다면, 지금과 같이 오만하게 말할 수 있었을까. 회의주의를 통해 신과 종교에 의지하는 일을 거부하며, 살아있는 사람들과의 건강한 관계에서만 희망을 찾겠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을까. 사실 그럴 자신이 없다. 칼 세이건과 같은 훌륭한 과학자도 “만일 우리가 매우 절망적인 상황에 있다면, 우리는 누구나 회의주의의 무거운 부담을 지는 일을 기꺼이 포기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나는 매주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나간다. 무엇을 믿건, 무엇을 진정한 희망으로 생각하건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나가는 순간만은 그러한 것들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어쩌면 어머니가 믿는 신은 정말로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사흘이 고비라던 생후 8개월짜리 아이가 이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고 똑똑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뉴스에 나오는 비정한 어머니들이 그랬듯 장애를 가진 아이를 차가운 한강물에 던져버리거나 이불 속에서 질식시키지 않고, 내 어머니는 고립무원의 절망을 이겨냈다. 하지만 신이 없고, 그가 가져다 줄 희망이 없고, 내세의 삶이 없더라도, 신에 대한 믿음이 나의 어머니의 젊은 시절 힘든 삶의 일부분을 지탱해왔고, 그리하여 스물여섯해의 내 삶을 구성해왔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 나는 과학과 이성의 힘을 믿으며 ‘이상한 것’들에 대한 회의주의자가 되기를 원하면서도, 어머니의 신앙과 그녀의 기도소리만은 여전히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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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화학부 04학번,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석사 진학 예정. 커피와 고양이, 책을 좋아하고 식상함과 무기력을 싫어하는 스물다섯의 귀차니스트. 다년간의 관악산 휠체어 라이딩으로 다져진 팔근육과 연약해 보이고 싶다는 욕망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지체장애인. '대중의 과학화'를 꿈꾸며 멋진 저술가가 되고 싶은 평범한 과학도. 내게는 일상인 풍경들 속에 나 역시 풍경으로 비춰질까, 부조화한 이방인으로 비춰질가 오늘도 고민-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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