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겐 너무 친근한 하얀 가운

오래 전에 할머니께서 내게 늘 말씀하시던 말씀처럼 ‘생기다 말아버린 애’라서 그런지 어릴 적부터 잔병치례가 유난히도 많았다. 음식을 잘 소화 못 시켜서 툭하면 응급실에 실려가기 일쑤였고, 독감도 항상 내 차지가 되었다. 그 때마다 우리 가족은 갈등을 했던 것 같다. 동네 병원에 날 데리고 가려면 누군가 업고 뛰어야 하는데 너무 자주 아파하니 가족들도 그 상황에 힘들어 한 것 같았다.

잔병치레 외에도 재활치료 받으러 병원을 내 집처럼 드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물리치료를 받다가 목에 금이 간 적도 있다, 그 당시 7살이었던 나를 물리치료 선생님과 어머님이 억지로 나를 세우다가 실수로 목이 옆으로 넘어간 것이었다. 그러나 제대로 서지 못 했던 나 때문에 어머님은 화가 많이 나셨기에 내가 목이 아프다고 며칠 동안 칭얼대도 신경을 안 쓰고 계셨다. 그러다가 아프다고 매일 말하니까 일주일 뒤에서야 병원에 데리고 가셨고, 검사결과 목에 금이 간 것이라고 판명을 받았다.

그 날 이후 생애 첫 입원생활을 시작되었고, 너무 어릴 때 일이라서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예술가인 프리다 칼로 못지않은 상반신 깁스를 하고 병원에 한 달 간 입원을 했던 것 같다. 퇴원을 하고서도 석 달 동안 그 상반신 깁스를 하고 지내야 했는데 석 달 후에 깁스를 풀고 나서 나는 다시 본격적인 의료적 모델이 되었다.(그 때 답답했던 느낌은 내 몸 어딘가에 남아있는 듯하다.) 우리 어머님은 내 ‘장애를 고치기 위해’ 뜬소문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셨고, 내 몸은 온갖 재활 전문가들의 의해 평가되곤 했었다. 그리고 더는 ‘장애가 고쳐지지 않자’ 그 전문가들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의료적인 모델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2. 장애를 가진 몸으로 건강하게 살고 싶다

그렇게 나는 의료적인 모델에서 벗어나 20대를 맞이하였고, 심한 독감 등이 아니면 병원에서 큰 신세를 지지 않았다. 그리고 3년 전, 혼자 집에 있다가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마시려다가 실수로 우유를 놓쳤다. 그래서 우유를 줍기 위해 허리를 숙였는데 너무 깊게 숙여져서 다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곤 저녁 활동보조인이 올 때까지 6시간여 동안 허리가 숙여진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 뒤부터 허리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졌고, 나빠진 상태에서 지속적으로 무리한 활동을 해 오다가 결국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기 시작하였다.

어쩔 수 없이 큰 대학병원을 돌아다녔고 비싼 검사를 받아 보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는 답변만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한 대학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뜻밖에 판명을 받았다. 의사는 검사결과 허리보다 목상태가 심각하다며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서서히 전신마비가 와서 모든 신체기능을 마비시킬 것이고, 그 원인은 뇌병변장애로 인해 불수의적인 움직임 때문에 경추 1~2번이 손상된 것 같다며 굳은 표정으로 설명해 주셨다.

사실 병원에 오래 입원할 생각이 없었기에 한동안 간병문제로 가족들과 엄청 싸워야 했다. 왜냐하면 내 활동보조를 전담해 오신 우리 어머님은 연세도 많으시고 건강상태가 매우 안 좋으셔서 어머님이 편찮으시다 하면 나 때문에 편찮으신 것 같아서 알 수 없는 죄책감마저 들었다. 그런 어머님이 간병비가 없어서 내 간병을 하시겠다고 하셔서 화를 많이 냈다. 나는 조금씩 모아둔 저축으로 간병비로 쓰겠다고 하였지만 어머님은 내가 힘들게 저축한 걸 간병비로 쓰게 할 수 없다는 입장이셨다. 하지만 이 대립도 병원에 입원해 있는 기간이 길어지고 수술을 해야 한다는 판명 앞에 수그러들고 말았다. 사실 그 대학병원에 있는 재활병원 간호사들은 좋은 분들이었다. 큰 대학병원마다 보호자 혼자서 환자를 옮길 수 없을 때 부르는 이동팀이 있는데 대부분 비장애남성이라서 장애여성인 내게는 부담스러웠다. 그렇다고 어머님이 날 옮길 수 있는 상황이 못 되었는데 그 재활병원 간호사들이 친절하게 도움을 주어서 어머님도 조금은 수월하셨다.

그런데 사정상 퇴원을 한 후 다시 입원을 하게 되었고 재활병원이 아닌 다른 병동에 입원하게 되면서 고된 병원생활이 되었다. 그 병동 간호사들은 나를 옮겨주는 것에 호의적이지 못했고, 그 때마다 심리적인 불편함을 느껴야 했다. 심지어 어느 날 화장실 이동보조를 부탁했을 때 화장실 안에 이동팀인 남자 직원을 보내온 것이다. 그 때만큼 내 장애가 원망스러운 적도 없었을 것이다. 변기에서 휠체어로 옮겨 앉는 행위가 의료적인 행위도 아닌데 그런 식의 태도는 나를 완전히 무시한 것이었기에 너무나 화가 났었다. 그러나 아무런 항의를 못 했다. 그 이유는 내가 수술 후유증이 심하여 퇴원시기를 미루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그 병원에 있어야 하는데 병원 측에서는 퇴원을 권유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참 많이 싫었지만 뇌병변 장애를 전문적으로 진료를 보는 병원은 흔하지 않기에 그 병원과 등 돌리고 싸울 자신이 없었다.

지금도 그 병원에 다니며 물리치료를 받고 있다. 단체 상근 활동을 그만 두면서 의료비가 감당이 안 되어 치료 날짜도 줄였다. 나는 건강이 나빠지면서 많은 고민이 들기 시작하였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프다는 것, 장애를 가진 사람이 아프다는 것은 참 서글픈 일인 것 같다. 이 서글픔이 사라지려면 너무나도 바뀌어야 할 것들이 많다.

그것은 돈이 있어야만 병원에 갈 수 있는 현실과 장애를 극복 혹은 비장애 몸으로 만들려는 의료적인 관점이 아니라 장애를 가진 몸으로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의료서비스가 개발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 건강권을 지키며 오랫동안 독립을 유지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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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제 나이는 서른 살에 접어들었습니다. 가족들 곁을 떠나서 혼자 독립을 시작한지 6년째 되어갑니다. 남들은 저한데 ‘너 참 까칠하다.’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합니다. 그럼 저는 ‘이 까칠한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까칠해질 수밖에 없다고!’라고 답합니다. 이 칼럼을 통해 중증장애여성으로 까칠하게 살아오면서 겪었던 경험과 삶의 대한 고민을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앞으로 제 글을 읽으시는 분들과 함께 공감하고 고민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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