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맥날리는 태어날 때 이미 아무것도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는 시각·청각장애인이다. 경제 사정이 좋았던 미셸의 부모도 미셸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마지막 선택으로 가정교사를 채용하게 되는데 그 사람이 바로 미셸의 미래를 바꾼 데브라이 사하이다.
하지만 부모는 사하이의 혹독하고 잔인한 교육방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하이는 눈에 뻔히 보이는 미셸의 앞날을 도저히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어 어머니를 끝까지 설득해서 아버지가 출장 간 3주간의 시간을 허락받는다. 그 3주라는 기간 동안 미셸과 사하이는 그야말로 치열한 싸움이 전개된다.
국제영화제를 통해 인도영화를 접해본 적은 있지만 그렇게 쉽지만은 않는 것 같다. 그 중에서 ‘블랙’(산제이 렐라 반살리 감독, 드라마, 인도, 2005, 122분)은 필자에게 소중한 것을 일깨워 준 보석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앞으로 펼쳐질 미셸과 사하이의 관계를 통해 사랑이라는 단어 앞에 붙는 수많은 수식어를 무색케 하는 그런 사랑을 보여준다.
사하이의 노력에 하늘이 감동했는지 미셸은 부모 앞에서 처음으로 엄마, 아빠라는 말을 하게 되고, 이때부터 미셸과 사하이는 떼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다.
미셸의 열정과 사하이의 열정은 결국 대학까지 가게 된다. 대학교육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벌써 몇 년째 유급인지 모른다. 설상가상으로 사하이는 편지 한 장만 남겨두고 홀연히 미셸 곁을 떠난다. 그리고 느닷없이 불쑥 찾아온 사하이 선생.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말을 어떻게 하는지 아무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는 알츠하이머 환자가 되어서 나타난 것이다.
이제는 제자 미셸이 자신의 선생님을 가르치기로 한다. 병원에서는 재활이 불가능하다고 말하지만 미셸의 고집을 꺾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이 받은 사랑을 선생님께 다시 되돌려드리는 미셸의 모습은 이 영화의 백미이다. 너무 감동적이어서 차마 말을 잊지 못하겠다.
‘블랙’은 인도의 최대영화제에서 무려 11개 부문에서 상을 휩쓸었다. 한 사람을 위해 포기하지 않는 열정과 진정한 사랑을 보여줬던 사하이 선생의 삶을 보며 많은 이들이 진한 감동을 느꼈을 것이다. 장애를 극복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를 보면 대부분 영화의 초점이 장애인 당사자에 맞춰져 있지만 이 영화는 그 옆에 있는 비장애인의 모습을 중심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기존의 영화와 약간의 차별을 두고 있고,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게 만든다.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사하이는 미셸의 부모와는 달리 온전히 미셸의 입장에서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부모도 미셸을 사랑하고 관심을 가졌지만 딸의 입장이 아니라 자신들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대한다면 그 어떤 감동도 주지 못한다.
사하이가 미셸에게 제일 처음 가르쳐 준 단어를 보면 얼마나 미셸을 생각하는지 짐작이 간다. a, b, c 가 아니라 b, l, a, c, k 이다. 블랙, 현재 미셸이 처해있는 어둡고 갑갑한 상황을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 숨어있다. 또한 불가능이란 용어를 가르쳐주지 않았던 것도 미셸을 더욱 성장시킬 수 있었다.
우리도 부모자녀사이, 부부사이, 친구사이에서 상대를 이해하고 사랑한다고 말을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상대방 입장이 아닌 자신의 입장에서의 이해하고 사랑하는 경우가 많다. 이 영화를 보면서 상대를 이해한다는 것, 특히 장애인을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
사하이 선생의 열정이 한 인생을 어떻게 바꿨는지 미셸의 졸업식장 연설을 통해 알 수 있다.
"수많은 시도 후에 수차례 떨어지긴 했지만…거미는 마침내 집을 지었습니다. 개미가 산을 기어 올랐습니다. 거북이가 사막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오늘, 미셸 맥날리도 드디어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겐 모든 게 검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선 검은색의 새로운 의미를 알려주셨습니다. 검은색은 어둠과 갑갑함 뿐이 아닙니다. 그건 성취의 색입니다. 지식의 색입니다. 졸업 가운의 색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입고 있는 색이지요. 오늘, 난생 처음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