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한 마리 새는 집으로 날아 들어왔다. 실수였는지, 운명이었는지, 우연이었는지 모르지만, 그 새는 오래두고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새장에 갇히게 되었다. 사람들은 새에게 먹이를 주고, 물을 주면서 잘 길러준다고 하였다. 날마다 새가 노래하는 소리를 들으며 즐거워했다. 가끔 새가 만들어내는 분비물이 귀찮게 하였지만, 새가 있어서 좋았다.

그런데 언제 부터인가 새 장에 갇힌 새의 노래는 새의 울음소리로 들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주는 모이와 물에 의하여 길들여진 자신의 모습에 대하여 신음(呻吟)하는 것 같았다. 더 멀리 더 높이 자유롭게 날지 못해서 고통스러워하는 절규(絶叫)로 느껴졌다. 어제도 오늘도 새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자유로운 새를 새 장에 가둬둔 사람들은 오히려 새를 길러주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자신들을 애조인(愛鳥人)이라고 스스로 자인하고 있었다. 사실 그들은 애조인(哀鳥人)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새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새 장 안에서 길러지는 것 밖에는. 새는 자신의 꿈도 가질 수도, 기를 수도 없었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돌연히, 그렇다. 갑자기 새에게 자유를 주고 싶었다. 그리고 새장의 문을 열었다. 새는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당황하고 있었다. 문이 열려있었지만 그 열려진 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나는 기다렸다. 드디어 새는 그 문으로 나왔다. 날았다. 새가 날았다. 새는 자유를 얻었다. 나는 새가 저 멀리 자유롭게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새 장을 떠난 새를 향하여 박수를 쳤다.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꿈은 얼마 가지 못했다.

새는 날 수 없었다. 여전히 날개를 퍼득였지만 힘차게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기에는 힘이 부족했다. 새는 먹이를 잡아내기에도 힘이 부쳤다. 새의 스피드는 작은 벌레보다 늦었다. 새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소위 재활과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고등학교 입시를 치루고 난 후, 나는 다리에 화상을 입고 방바닥에 엎드려져 있었다. 화상이 다 치료된 후에, 나는 일어설 수 있는 줄 알았다. 그것은 내 생각이었을 뿐이다. 나는 일어설 수 없었다. 그나마 희미하게 남은 다리 하나의 힘조차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4~5개월이 지나서야 힘이 회복되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다리는 내 몸을 버티는 기둥이 되었다.

장애인의 인권. 얼마나 좋은 말인가? 장애인 당사자주의. 당위적인 언어이다. 장애인의 인권을 주장하기 위해서 투쟁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훈련하고 노력하며 기다리는 과정도 필요하다. 앞에서 이끌어가는 사람의 의지와 정보는 뒤에서 좇아가는 사람의 의지와 정보와 비교하면 대단한 격차를 느낄 수 있다.

겉으로는 하나 된 모습 속에서 장애인의 인권을 외치고, 주장하는 모습을 읽을 수 있지만, 이러한 노력의 결실도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전부인가? 장애인 현장의 파편화된 모습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장애인 부모회, 지체장애인 단체, 청각장애인 단체, 시각장애인 단체, 지적장애인 단체, 장애인 단체 연합회 등 모두 하나가 아니다. 이들은 모두 우리가 정통이고, 우리만이 제대로 된 단체라고 한다. 그리고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다. 게다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장애인 단체의 지향성은 해바라기처럼 변화하고 있다.

얼마 전 정부 산하의 장애인 관련 단체의 인사이동에도 몇몇의 소수의 사람들의 자리이동이 예약된 것 같은 뉘앙스가 번지고 있고, 그 소문 역시 소문에 불과할 뿐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결국 그러저러한 사람들의 자리차지로 인하여 적격성 있는 사람의 진입은 불가능하다.

한국에서의 등록된 장애인 수는 아직 우리의 주장처럼 10%가 아니라 3~4%에 머물고 있다. 소수(Minorities)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러한 소수가 나뉘어져 있다. 자기 목소리를 갖게 되고, 그 목소리를 외칠 수 있게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소리는 다양한 목소리의 대변이 아니라 갈라진 소음(騷音)으로 들려지고 있다. 자유로운 것 같지만,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마치 새장을 떠난 새가 자유로운 환경에 살게 되었지만, 자유롭게 날 수 없었던 것처럼.

보다 경직되고, 보다 융통성이 없는 장애인 판이 되고 있지 않은지. 결국 우리가 비판하고 비난하는 집단의 모습으로 우리의 모습이 변질되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야할 시기가 오늘이라고 보인다.

국회에 장애인이 6명 이상이 들어왔다. 건국 이후 최대의 국회입성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장애인당으로 초당적인 노력을 하겠다고 했지만, 실제의 모습은 그렇게 보여지지 않는다. 그저 구호일 뿐이다.

국회 안에 장애인이 없어서 장애인의 목소리가 파묻혀있는 줄 알았는데, 작년에는 2명밖에 없어서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는데, 6명이나 되어도 그 소리가 하나 되어 함성으로 들려지기에는 요원한 것 같다. 역시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새장을 떠난 새가 자유롭게 날 수 있는 그 날을 기다린다. 진짜 자유로운 새가 되어 그저 하늘을 자신 삶의 장이 되기를 희망하면서.

이계윤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숭실대학교 철학과 졸업과 사회사업학과 대학원에서 석·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한국밀알선교단과 세계밀알연합회에서 장애인선교현장경험을 가졌고 장애아전담보육시설 혜림어린이집 원장과 전국장애아보육시설협의회장으로 장애아보육에 전념하고 있다. 저서로는 예수와 장애인, 장애인선교의 이론과 실제, 이삭에서 헨델까지, 재활복지실천의 이론과 실제, 재활복지실천프로그램의 실제, 장애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펴내어 재활복지실천으로 통한 선교에 이론적 작업을 확충해 나가고 있다. 이 칼럼난을 통하여 재활복지선교와 장애아 보육 그리고 장애인가족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독자와 함께 세상을 새롭게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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