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복지의 이념 중 핵심적인 것은 ‘사회통합(Social Integration)’이다. 사회통합이란 무엇인가? 본래 이 이념은 장애인을 시설에서 생활하게 함으로서 야기된 사회와의 분리된 구조를 해체하여 통합된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것이다.

사회통합은 장애인과 비장애인,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한국인과 외국인, 키 큰 사람과 키 작은 사람, 뚱뚱한 사람과 날씬한 사람, 많이 배운 사람과 그렇지 아니한 사람, 부자와 가난한 자 등 대립되어 보이는 집단 사이에서도 요구되는 이념이다. 그 이유는 사회란 다양한 사람이 하나의 틀 안에서 다양한 모습을 갖되, 어우러져서 살아가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사회통합을 이룩하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노력과 의식의 변화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허구적(Fictious)일 뿐이다. 왜냐하면 통합된 사회는 주장할 수 있지만, 실현하기는 어렵기 때문이요, 그 실현이 어려운 일은 누구나 함께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 구체적으로 지적해 보면, 과연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과 더불어 사는 세상을 원하고 있는가? 비장애인이 장애인과 함께 사는 세상을 간절히 소망하는가? 학식 있는 자가 덜 배운 자와 손에 손잡고 살아가는 세상을 바라고 있을까? 머리로는 그렇게 바란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장애인과 결혼하려는 비장애인이 있을까? 장애를 가진 총각이나 처녀에게 결혼하자고 고백한 자녀를 흔쾌히 허락하는 부모가 있을까? 부자가 가난한 집의 자녀에게 자신의 자녀가 결혼을 하거나 시집을 가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선화공주가 온달에게 시집을 가는 일이 현실에서 쉽게 일어날 수 있을까?

물론 가능하다. 하지만, 그렇게 순탄한 것은 아니다. 어떤 이에게는 수월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여전히 높은 벽임에 분명하다. 그래서 이러한 사회통합을 위해서 주장하고 노력하는 사람은 항상 강자가 아니라 약자이다. 못 배운 자, 장애인, 여성, 약한 자들이 사회통합을 요구하고 주장한다. 최근에는 배려(consideration)가 아니라 권리(Human Rights)의 차원에서 주장한다. 마땅히 그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옳다. 그것이 맞다.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이것이 과격하게 주장한다고 해서 그러한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의식이 변화해야만 사회통합을 성취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마땅한 주장이라고 일방적이고, 과격하고, 지나치면(주장하는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그 주장을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 주장은 관철될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을 잡거나 의식을 바꾸는 일은 용이하지 않다.

장애인 복지의 방향은 장애인에 대한 이해가 없거나 비장애인으로 하여금 장애인에 대한 오해를 갖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이기적(selfish, egoistic)이다. 누구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다. 누구나 자기에게 손해가 오는 것을 싫어한다. 장애인에게 손해가 생기는 것을 장애인이 싫어하듯이, 비장애인에게 손해가 가해지면, 비장애인도 당연히 싫어한다.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렇기 때문에 장애인 복지와 운동 방향성을 올바르게 잡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더불어 살기’, ‘사회통합’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이념이다. 이를 위해서는 장애인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유익하고, 아름답고, 약간 불편해도 실질적으로는 기분이 좋은 것임을 알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장애인 운동의 속도조절이 필요하다. 한꺼번에 다 이루려는 욕심은 속도 조절으로 통해서 단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장애인에 대한 이해는 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이제 장애인을 향하여 혐오스러운 용어로 비하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물론 여전히 장애인의 권리에 해당되는 복지시책을 빼앗고 갈취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사실 이러한 일의 배경에는 장애인도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장애인 이름을 빌려 주어 차를 사게 하고, 비장애인이 그 차를 이용하게 하고, 게다가 장애인 주차 마크까지 방임하여 장애인이 장애인 주차구역을 이용하는 일에 방해가 되도록 하는 일을 방조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장애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많이 좋아졌다. 많은 비장애인은 장애인과 함께 하는 일에 약간의 불편은 감수하려고 한다. 그러한 사람들이 급증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장애인의 권리주장(장애인만 편하게 살게 된다고 하거나 장애인들의 권리만이 최고라는 생각)이 올바른 방향성을 잃게 되면 비장애인으로 하여금 장애인을 간접적으로 배척하게 만드는 소지를 제공할 수 있다.

세상에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좋아졌어도, 여전히 장애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이러한 인식을 바꾸도록 해야 한다. 특히 이를 위해서는 장애인과 더불어 사는 일이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지름길임을 알도록 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장애인의 의무이다. 장애인의 권리와 의무를 함께 주장하고 실천하므로 더불어 사는 세상을 하루속히 앞당겼으면 좋겠다.

더불어 산다는 통합의 내용에는 보다 다양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장애인 간의 통합도 들어있다. A범주의 장애인이 다른 범주의 장애인을 배려하고, 다른 범주의 장애인도 마찬가지이다. 장애 정도에 따른 통합도 들어가 있다. 중증 경증의 구분보다는 서로를 배려하고 포함하여 나아가는 자세가 중요하다.

더 나아가 아픔을 알고 사는 장애인이 아픔을 모르고 사는 비장애인을 이해하는 노력도 무시할 수 없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일방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쌍방의 노력을 통해서 무엇인가 이루기 위해서는 일정기간 동안만큼은 일방의 노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더불어 사는 그 운동의 방향이 제대로 가기 위해서 장애인이 해야 할 의무도 감당해야 할 것이다. 권리주장과 아울러 함께 손잡고 나아갈 수 있는 의무도 우리가 노력해야 한다.

이계윤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숭실대학교 철학과 졸업과 사회사업학과 대학원에서 석·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한국밀알선교단과 세계밀알연합회에서 장애인선교현장경험을 가졌고 장애아전담보육시설 혜림어린이집 원장과 전국장애아보육시설협의회장으로 장애아보육에 전념하고 있다. 저서로는 예수와 장애인, 장애인선교의 이론과 실제, 이삭에서 헨델까지, 재활복지실천의 이론과 실제, 재활복지실천프로그램의 실제, 장애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펴내어 재활복지실천으로 통한 선교에 이론적 작업을 확충해 나가고 있다. 이 칼럼난을 통하여 재활복지선교와 장애아 보육 그리고 장애인가족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독자와 함께 세상을 새롭게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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