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은 내가 캘리포니아 주 공무원으로 일한지 25년이 되는 날이었다. 25년을 근무한 직원에게는 주지사가 서명한 증서가 주어지며 직장에서 파티를 열어주기도 한다.

얼마전 지역사무소장이 내게 25년 기념일을 어떻게 보내고 싶으냐고 물어왔다. 난 함께 근무하는 매니저들과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싶다고 답해 주었고 지난 6일 사무실 근처의 식당에서 그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25년을 근무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들을 몇가지 들려달라는 동료들의 청에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처음 채용 인터뷰를 갔던 곳은 수질개발국이었다. 마침 그날이 할로윈데이라 어릿광대로 분장한 두명의 여성 수퍼바이저와 인터뷰를 하며 미국이 참 재미있는 나라라는 생각을 했었다.

두번째로 인터뷰를 간 곳이 지금 근무하고 있는 산재보험기금이었는데 소송을 담당하는 법률부였다. 하는 일 중에 높다란 선반에 서류 등을 올리고 내려야 하는 일이 있어 채용이 되지 않았다. 다행히 그날 나를 인터뷰했던 이가 나를 다른 부서에 추천해 주어 공무원으로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1983년 가을의 일이다.

1년반쯤 지난 무렵 승진시험에 합격하여 승진이 되었는데 며칠후 나의 승진이 취소가 되었다. 대신 다른 지역사무소에 있던 백인여성을 승진시키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나보다 순위가 앞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애매모호한 답을 들었다.

그 후, LA 지역사무소로 자리를 옮겨갔다. LA 지역사무소는 1950년대 지어진 건물이라 장애인용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내가 출근하는 날까지 1층에 있는 화장실을 남여 공용의 장애인 화장실로 개조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으나 막상 출근을 하니 아직도 공사 중이었다. 오후에나 사용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난 그날 아침 16온스 크기의 일회용 컵에 소변을 보아야 했다.

80년대 말에는 외근직인 직업재활사 자리에 지원했으나 나보다 근무성적이 훨씬 떨어지는 백인남성에게 그 자리가 돌아갔다. 다음해 같은 자리가 다시 비었을 때는 미리 매니저와 수퍼바이저를 찾아가 비록 내가 휠체어 장애인이긴 하지만 운전도 가능하고 외근도 할 수 있다는 설명을 미리해 두었다.

두번째 시도 끝에 직업재활사가 되었고 회사에서는 나를 위해 차를 개조해 주었다.

2004년에 매니저로 승진하기까지 10여년 동안 수퍼바이저로 근무했는데 10번의 승진 인터뷰에서 실패하고 11번째 승진에 성공했다. 이때 내가 배운 교훈은 인내하고 기다리면 결국 기회는 찾아온다는 것이다.

누군가 내게 ‘미국에 장애인 차별이 있느냐’ 고 묻는다면 미국에는 장애인 차별뿐만 아니라 이민자에 대한 차별, 성차별 등 온갖 차별이 있다고 답해 줄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은 차별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의 나라이기도 하다. 고국에서 초등학교 문턱도 넘어보지 못한 중증장애인이며 동양계 이민자인 내가 미국에 와서 학업을 마치고 공무원이 되어 중견간부까지 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이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닌가 싶다.

주변에서는 내게 언제쯤 은퇴할 것인가를 묻는 이들이 늘고 있다. 아마도 내가 나이가 들어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캘리포니아 주 공무원은 10년 이상을 근무하면 50세부터 은퇴가 가능하다.)

하지만 아직 일을 그만둘 생각은 없다. 한주를 마치고 사무실 문을 나서는 금요일 오후의 즐거움을 당분간 더 즐기고 싶다.

나의 기억 속에는 내가 한때나마 걸어 다녔다는 사실은 흔적조차 없습니다. 다만 낡은 사진첩에 남아있는 한 장의 흑백사진 이 한때는 나도 걸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줄 뿐입니다. 세살에 소아마비를 앓았습니다. 81년에 미국에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주정부 산재보험국에서 산재 근로자들에게 치료와 보상을 해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누군가 이글을 읽고 잠시 즐거울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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