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장애인이라는 단어가 낯설던 1981년, 내 나이 25살에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내가 가진 유일한 학력은 미국 고등학교 졸업자격시험 합격서와 (GED) 토플 성적이 전부였다.

낯선 땅에서 내가 생각해 낸 것은 미국의 공공기관과 대기업에 편지를 쓰는 일이었다. 전화번호부를 펴 놓고 50여곳에 편지를 썼다. 대부분 답장을 해 주었지만 아무도 나를 채용하겠다는 답장은 보내 주지 않았다. 주정부 재활국을 찾아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답장을 보내준 이가 있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장애인 재활국이었다. 그무렵 남가주에서는 방위산업체가 호황을 누리고 있었으며 전자 조립공이 많이 필요했다. 많은 이민자들이 단기교육 후에 조립공으로 취업을 하고 있었다. (그후 90년대초 냉전시대의 종식과 함께 방위산업의 몰락으로 대규모 감원사태가 벌어졌다.)

나를 상담해 준 재활국의 카운슬러도 대뜸 내게 기술학교에 등록을 해 줄테니 앉아서 작업이 가능한 조립공을 해 보라고 권했다. 나는 며칠을 두고 그와 다투었다. 사무직종에 취업을 하고 싶다고 우겼다. 그는 내가 필기시험을 보아 성적이 좋으면 사무직에 취업을 알선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며칠후 시험을 보았고 다행히 성적이 좋아 작은 부동산 회사에 취업을 하게 되었다. 내가 쉽게 취업을 하게 된데는 한국에서 배워두었던 영타가 도움이 되었다. 그곳에서 2년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 미국 사람들과 그들의 문화, 사무실 일 등을 배웠다.

같은 해 가을에는 2년제 대학에 입학을 하여 그토록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후 공무원 시험을 치러 지금의 산재보험기금에 입사하게 되었고 어느덧 2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얼마전 한국에서 온 손님들과 주정부 장애인 재활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내게 도움을 주었던 카운슬러는 수년전 은퇴를 했다고 한다.

직원들과 담화를 나누며 28년전 나의 경험을 이야기하니 요즘은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요즘 재활국에서 가장 우선하는 것은 장애인의 ‘informed decision’ 이라고 한다. 한국말로 번역을 하자면 ‘잘 알고 내리는 결정’이라고 해야 할까.

장애인의 재활에 있어 재활국이 일방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 당사자와 의견을 나누고 재활국의 카운슬러는 다양한 결정에 따르는 득과 실, 그리고 재활국에서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의 한계를 설명하여 장애인으로 하여금 최선의 선택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요즘 한국에서 자주 거론되는 ‘당사주의’와 비슷한 맥락이 아닌가 싶다.

장애인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며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장애인에게 필요한 것이 의료재활이든, 직업재활이든, 또는 사회적응 훈련이든 간에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여 장애인 스스로 득과 실을 비교한 후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 아닌가 싶다.

때로는 소망과 현실사이에 큰 간격이 있을 수도 있다. 이런 간격을 단번에 좁히기는 힘들다. 그러나 장애인 스스로 노력하고 주변의 환경이 개선되면 점차 좋아질 것이라고 믿고 싶다.

세상사에 일방통행이란 없다. 장애인 복지문제도 함께 고민하고 함께 노력하는 가운데 풀어나가야 한다. 자립한 장애인은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뿐 아니라 사회에도 공헌을 하게 된다는 인식의 공감대가 형성된다면 쉽게 해결될 수도 있는 일이다.

나의 기억 속에는 내가 한때나마 걸어 다녔다는 사실은 흔적조차 없습니다. 다만 낡은 사진첩에 남아있는 한 장의 흑백사진 이 한때는 나도 걸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줄 뿐입니다. 세살에 소아마비를 앓았습니다. 81년에 미국에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주정부 산재보험국에서 산재 근로자들에게 치료와 보상을 해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누군가 이글을 읽고 잠시 즐거울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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