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놀이방에서 아이들과 어울리며 놀고있는 승혁이.

월요일 아침부터 마음이 한없이 무겁고 바쁘다.

지난주 광복절 공휴일에 토요 휴무일이 겹치게 되자 우리가족 모두 문경 시댁에 가서 고추 따는 일을 도와드리고 일요일 오후가 되서야 집에 도착했고 어머님이 손수 따서 보내주신 깻잎이며 열무 등 각종 채소를 오래두면 시들까봐 다듬고 김치를 담그느라 일요일 밤을 거의 새우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거리여행에 지쳤는지 승혁이와 승혜, 두 남매녀석들은 아침 9시가 넘었는데도 코까지 골며 깊이 자고있어, 일어날 기미는커녕 잠꼬대까지 하며 꿈나라 속을 헤매고 있는 듯 하다.

한시라도 빨리 깨워 각각 어린이집에 바래다주기 위해(두 아이 모두 구립 어린이집에 등록했었으나 승혁이는 장애아 '특별전형'으로 우선 입학했고 승혜는 대기자가 무려 18명 가량 밀려 입학은 꿈도 꿀 수 없어 집 근처 사설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다) 30분도 넘게 두 녀석을 흔들고 소리도 질러보고 급기야는 찬물까지 동원해 얼굴에 뿌려보지만 애타는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약올리려는 것인지 창밖엔 야속하게도 비마저 쏟아지고 있다.

치료실로 가는 10여분의 도보가 마라톤처럼

겨우 아이들을 깨우고 씻기고 우비까지 입히는데 성공했지만 장거리여행을 마치고 난 후의 후유증이 여지없이 승혁이에게 나타난다.

"가자"하고 큰소리로 외치고 현관문을 나서는데 갑자기 안방으로 휙 뛰어들어가 문을 잠근 후 방문을 주먹으로 쾅쾅 두드리며 뭐라고 웅얼거리며 울기 시작한다. 겨우 열쇠로 문을 여니 이번엔 땀을 뻘뻘 흘리며 겨우 입혀놓은 옷들을 거칠게 벗겨내려 하고…. 10여분 거리에 위치한 멀지 않은 어린이집이건만 이렇게 어린이집에 가지 않으려고 승혁이가 몸부림치는 날에는 10여분의 도보가 마라톤처럼 멀게만 느껴진다.

하필이면 그날따라 승혁이 담당 선생님이 교육이 있어 안 계시고 다른 선생님이 아침부터 예민해하는 승혁이를 겨우 달래 어린이집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돌아서며 겨우 한숨을 몰아쉬고 집으로 한달음에 달려와선 또다시 숨쉴 틈 없이 밀린 집안 일을 하다보니 어느덧 언어치료실에 갈 시간이다.

승혁이에게 시골여행의 후유증이 또 한번 시작되었는지 늘 보는 언어치료실 선생님을 보곤 어리둥절해 하고 선생님이 웃으시며 승혁이를 끌어안고 치료실방으로 들어가자 그제서야 아침 먹고 미뤄둔 커피 한 잔이 간절하다.

커피자판기가 있는 층으로 가려는데 치료실 밖 복도 저 끝에서 한동안 보지 못했던, 낯익은 여자아이의 얼굴이 눈에 띈다.

걸음걸이가 다섯 살 또래아이들에 비해 다소 자유롭진 못하지만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면 꼭 달려와서 마주보는, 붙임성있는 성격의 아이다. 그동안 승혁이의 치료시간이 바뀌게 되어 못 보았었는데 생각해보니 아이엄마가 몇 달 전 임신 6개월쯤이었던 게 생각났다.

그런데 소파에 뒤돌아 앉아있는 아이엄마의 모습이 왠지 홀쭉하니 출산한 모습 같다. 인사도 할겸 뒤에서 "안녕하세요? 근데 둘째 낳으셨어요"하고 물어보는데 아이엄마가 뒤돌아보며 약간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웃는다. 마침 밥을 먹고 있던 중이었다. 언어치료실에서는 이런 풍경이 흔하다. 이곳에 아이들 중 대다수가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차도든, 길이든 어느 쪽으로 마구 가서 갑자기 사라져버리곤 하기 때문에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엄마는 어쩔 땐 식사조차 제대로 하기 힘들다.

더구나 아이가 사설 언어치료실말고도 복지관 등 특수교육을 받기 위해 엄마는 자기 시간을 갖는 것은 꿈도 꿀 수가 없고 하루 24시간 중 아이가 잠든 시간을 빼놓고는 오로지 아이만 쫓아 다녀야 하므로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는 시간조차 사치스럽다. 장애아를 둔 아이엄마들에게 식사란 다만 아이를 돌볼 힘을 얻기 위해 허기진 배를 채우는 의미를 가질 뿐이다.

그런데 "아직 아침도 못 먹어서…"라고 어색하게 웃던 아이엄마의 웃음은 또 다른 의미가 있는 듯 하다. 그리곤 잠시 후 조용히 "둘째…, 유산됐어요. 아이가 갑자기 뱃속에서 놀지 않아서 병원에 가서 초음파로 봤더니 그냥 누워있듯이 죽어있는 거 있죠" 하는데 마음이 어찌나 찡하던지 잠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당연히, 짐작했던대로 아기의 유산은 큰아이 특수교육 때문에 엄마가 너무 피곤하고 힘들어서 비롯된 것이었다.

연예인 매니저보다 더 바쁜거 있죠

전에 했던 말이 생각난다.

"저는요. 얘 때문에 제가 무슨 연예인 매니저보다 더 바쁜 거 있죠. 일주일 내내 오로지 딸아이 위주로 스케줄이 꽉 잡혀있어서 아이가 아프거나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기면 한 주일 계획이 엉망이 되 버려요. 그래서 전 아이가 아프거나 제가 아프게 되는 게 제일 무서워요."

언어치료실 1년여를 다니면서 나름대로 꽤 열심히 아이를 키워왔다고 자부했던 나에게 뒤통수를 치는 듯한 말이었다. 일주일 내내 아이를 위해서만 산다니, 그렇다면 엄마의 인생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비장애아를 키우는 엄마들도 가끔 이런 말을 내뱉곤 하지만 장애아를 키우는 엄마들에게는 일반아이들에 비해 두 배로 힘든 아이의 육아때문에 자신의 삶이 완전히 상실된 것 같은 자괴감에 육아스트레스가 한층 더하다.

우울증을 달고 사는 것은 기본이고 격의 없이 이웃아줌마와 이야기하는 일조차 왠지 두려워질 정도로 대인관계도 소심해지는 편이다. 물론 그 중에서도 어려움을 견디며 밝고 씩씩하게 살면서 장애아 부모들에게 모범이 되는 분들도 있겠지만 말이다.

오랜만에 보게 된 반가움 반, 아이를 유산하게 된 아픔에 대한 위로 반으로 치료실 밖에 나가서 정식커피는 아니지만 커피 두 캔을 사와 아이엄마와 마주했다.

자연히 이야기는 늘 그렇듯 아이에 대한 걱정으로 시작되었고 아이엄마는 지금 강도 높게 진행되고 있는 치료교육을 앞으로도 계속해야 하는지 고민이 많았고 나는 요즘 들어 부쩍 잦아진 승혁이의 자위행위(혼자서 있을때 고추를 만지거나 베개위에서 비벼대는 행동을 보인다)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다른 곳에서는 결코 할 수 없는 이런 고민들이 이상하게도 언어치료실에서는 스스럼없이 털어놓게 된다. 아마도 같은 고민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공통점을 지닌 사람들이기에 가능한 것 같다.

저마다 나름대로의 아이를 위한 해결방법은 모색하고 있지만 결국 아이엄마나 나의 가장 안타까운 점은 지금 아이가 갖고 있는 장애가 언제쯤 극복되고 끝날지 또 어느 정도까지 아이의 능력이 발달할 수 있을지 결코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같은 치료실을 다니고 있으면서도 아이들의 상태는 사실 비슷하면서도 매우 다르다. 어떤 아이는 언어치료를 시작한지 몇 달만에 말문이 트이고 인지능력도 놀랍도록 빠르게 진전되는가 하면 승혁이 같은 아이는 일년이 넘었는데도 단어정도는 말할 수 있지만 왜 말을 해야하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인지능력이 더디고, 또 어떤 아이는 빠른 발전을 보이면서도 문제행동 또한 많다. 천 명의 아이들은 제각각 천 가지의 능력을 가졌다는 말처럼 여기 언어치료실의 아이들은 저마다의 문제점과 고통을 지니고 있다.

언어치료실 앞은 즉석 특수교육 토론장

아이엄마와 나 두 사람의 대화는 어느새 우리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주위 엄마들까지 합세해 순식간에 특수교육 토론장이 되고 만다.

아이가 치료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는 동안 치료실 밖에서 아이를 기다리는 엄마들은 대부분 혼자서 골똘히 아이에 대한 고민에 잠겨있거나 그마저도 너무 가슴이 답답하면 비슷비슷하지만 혼자만의 감당하기 힘든 고민거리를 풀어놓는다.

언어치료실은 그렇게 아이와 아이엄마들의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곳이다. 매주마다 아이를 데리고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내가 지금 왜 이 곳에 있어야 하나 하며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다가도 아이가 무사히 30여분동안의 치료수업을 잘 받고 간혹 "오늘 **가 수업을 아주 잘 했어요. 언어표현도 많았구요" 하고 선생님께 칭찬이라도 들으면 아이와 함께 치료실을 나서는 발걸음도 가볍고 마음은 또다시 나도 모르는 희망에 부풀어오른다.

이렇게 꾹 참고 열심히 언어치료실 수업 잘 받게 하면 언젠가 우리 아이도 정상적으로 잘 자라서 좋은 날이 오겠지 하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언어치료실 현관문에 나름대로 '별명'을 붙이기로 했다. 밖에서 치료실 안으로 들어올 땐 절망의 문, 치료실 안에서 밖으로 나갈 땐 희망의 문으로 말이다. 그 이름이 농담 같은 별명으로만 끝나지 말고 '진담'이 되길 진심으로 바라며 오늘도 승혁이와 함께 치료실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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