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은 장애인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에이블뉴스

어렸을 적 나의 꿈은 쌍둥이 동생처럼 아이탬플 학습지를 푸는 것이었다. 몸이 불편한 나는 동생처럼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이 꿈이자 작은 소원이었다. 난 일반 아이들과 많이 달랐기에 남들이 다 갈 수 있는 집 앞의 하고많은 초등학교에 입학을 할 수가 없었다. 참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집으로 우편물 한통이 날라 왔다. 입학 안내서였다. 엄마께서 그 편지를 읽고 아빠와 며칠을 상의하고 고민하시더니 나한테 물어보셨다. “우리야~ 우리를 받아줄 수 있는 학교가 있다는데 갈래?”라고 나의 의사를 물으셨다.

그때로서의 나는 생각할 시간조차 아까웠었나보다. 엄마의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대답을 했다. “엄마! 진짜야? 나도 학교 다니는 거야?? 진짜? 나 학교 빨리 갈래”라고…. 그렇게 난 배움의 목적으로 장애인시설로 들어가야만 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에만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지 가족과 떨어져야 한다든지 기숙사에서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함께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은 당시 8살이었던 나에게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렇게 가족과의 떨어짐으로서 나의 학교생활은 1990년 3월 5일 시작됐다. 지금 뒤돌아 생각해보면 한편으로는 배움을 가질 수 있게 해준 곳이라 감사하긴 하지만 내가 다시 태어나서 장애인으로 또 똑같이 태어나 그 곳을 다시 가라고 한다면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다. 이제부터 그 속 이야기를 하려한다.

기숙사는 두 방에 한 명의 담당 선생님으로 구성이 되어 있었다. 방의 짜임은 한 방은 고학년이거나 작업장에 다니는 사람 위주였고 또 다른 한방은 어린 아이들이 담당 선생님과 함께 생활하는 방으로 구성이 되어 있었다. 담당 선생님 한 명에 7명 정도 맡는 셈이다.

일반적으로 시설에서 보육사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천사인양 착하고 이해심 또한 많을 것이며 사랑이 많다 못해 흘러넘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아이들을 훈련을 시킨다는 이유로 그 6~7살 밖에 되지 않은 중증장애 아이들을 밥을 혼자 먹게 앞에 식판만 가져다주고 ‘자기들 밥 다 처드실 때까지’ 못 먹고 있으면 그냥 인정사정없이 빼앗아 치워버리는 것은 약과이고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집 아이들한테는 공주, 왕자 대접하면서 고아이거나 부모님이 여유롭지 못해 잘 못 챙겨주는 아이들은 어려서 몸이 불편해서 낯선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말하는 것이 익숙지 않아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말을 하지 못해 그만 옷에 실수를 하게 되는 날이면 그날은 저녁을 굶거나 발바닥이나 혹은 정말 심하면 눈에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맞아야만 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서 보육사들에게 얼마씩이라도 주고 가는 아이들에 부모님이 계시는 아이들한테는 위에 같은 실수를 하여도 만사 ‘OK’이다. 장애인시설에서조차도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이는 존재한다. 경제적으로도 이런데 몸에 장애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이 작은 시설이 아닌 큰 사회에서 겪는 차이와 차별은 얼마나 심할지 모두들 생각해보아야 한다.

한참 사춘기인 아이들이 할 것 다 해놓고 자기 전에 유행하는 드라마를 보는 것은 눈이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맞아야 할 짓이고 어린 아이들을 일찍 재워놓고 마음 맞는 선생들끼리 밤이 늦도록 술이나 퍼마시다 동기 남자 선생님들과 눈이 맞아 하룻밤 자다가 임신을 하는 짓은 축하 받을 짓인가? 난 아직도 의문스럽다.

머리 큰 아이들이 그런 점들을 다 알고 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런 시설 조차 없다면 방구석에 처박혀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비참하고 더럽고 답답하지만 그 곳에 있는 이유는 학교가 있었기 때문이고 어린 나이에 서로 다른 지역에서 와 형제처럼 의지하고 지내던 친구들, 언니, 오빠, 누나, 형, 동생들이 있었기에 가능 했던 것이다.

그렇게 거기에서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12년을 있다가 졸업을 한 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고, 요양시설로 또 다시 보내지는 사람들도 있고 장애가 경증인 사람들은 취업이 되는 사람들도 역시 있다. 또 정말 드물게 1~2명씩 대학교 진학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난 시설에 있으면서 다짐한 것이 있었다. 거기서 우리들한테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던 인간들 보다는 성공 하자고…. 그래서 중증의 몸을 이끌고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인터넷으로 직접적으로 한 50군대는 이력서를 넣었었다. 마침 노력 끝에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초부터 광주에 있는 작은 무역 회사에 재택근무로 취업이 됐다. 한 1년 정도 일을 하다가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고향에서 청주로 대학교를 오면서 독립을 하기 시작했다. 정말 다른 세상이었고 또한 너무 즐거웠고 행복했다.

솔직히 힘든 일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도와주기로 했던 사람이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온다고 연락이 갑자기 와서 아파트 앞에서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기다리느라 3시간도 기다려 본적도 있고, 겨울밤에 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어 겨우겨우 물을 꺼내 마시다가 물을 다 쏟아 옷이 다 졌었는데 혼자 갈아입을 수 가 없어서 그 다음 날 아침까지 기다렸던 일. 새벽에 자다가 화장실이 너무 급해서 119를 불렀었던 일. 무수히 힘든 일이 많았지만 뒤돌아 지금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졸업하기 전에 비하면 참 행복하다. 시설에 있을 때가 지옥이라면 독립을 한 지금 힘들긴 하지만 천국이다. 정말 심한 중증장애인들에게 이 글을 읽음으로 작은 용기와 행복이 전달됐으면 한다.

장애인의 날인 지난 4월 20일 서울역 앞에서 열린 420장애인대회에서 장애인이 비가 오는 가운데에서도 즐겁게 자립생활 보장을 촉구하고 있다. ⓒ에이블뉴스

*이 글은 충북 청주시에 사는 에이블뉴스 독자 조우리씨가 보내온 기고문입니다. 에이블뉴스는 언제나 애독자 여러분들의 기고를 환영합니다. 에이블뉴스 회원 가입을 하고, 편집국(02-792-7785)으로 전화연락을 주시면 직접 글을 등록할 수 있도록 기고 회원 등록을 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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