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 뜨거운 한 획을 그은 장애 인물과 그의 열정적인 인생을 살펴보는 시간입니다. <장애인물 톺아보기>. 이 코너 함께 해주실 분은 이 분야에 이분만 한 연사가 없지요. 에이블뉴스 백종환 대표 함께 합니다. 어서 오세요.

질문0 : 우선 이 코너 이름이 <장애인물 톺아보기>인데 톺아보기가 무슨 뜻인지 대표님께서 먼저 설명을 해 주시고 시작하면 좋겠네요.

답변 : 톱아보다, 생소한 단어인데요. 사실 저도 처음 들어보는 단어인데요. 이번에 프로그램 개편하면서 우리 제작진이 코너이름을 정한 것인데요. 그래서 백과사전을 찾아 봤더니요.

톺아보다는 샅샅이 더듬어 뒤지면서 찾아보다라고 백과사전에 나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장애인물 톺아보기는 우리 장애계의 인물들을 샅샅이 찾아서 분석하고 정리한 내용을 이 시간에 청취자 여러분께 잘 설명을 드린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이 코너를 함께하게 됐는데요. 장애계 기자생활 33년 동안 직접 만나고 접했던 인물들과 혹은 우리 역사중에 장애인물을 발굴해서 톱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잘 준비하겠습니다.

질문1 : 자, 그럼 오늘 톺아볼 첫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답변 : 황연대 선생님이신데요. 그동안 직함은 장애계의 모든 직함을 모두 설렵하셨던 분이라 어떤 직함을 써야 할지 몰라 선생님이라고 호칭했는데요.

올해로 81세이신데요. 소아마비 장애를 가진 여성으로서 의사였고요.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장애인 이용시설인 정립회관을 설립하고 관장을 엮임하셨고, 장애인고용을 위한 기관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이사장, 한국장애인체육회와 한국장애인개발원의 전신인 한국장애인복지진흥회 상근부회장을 지내신 분인데요. 그야말로 우리나라 장애인복지와 고용, 체육 등에 기초를 놓으신 분이라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분에게는 몇 개의 별호가 있는데요. 장애인 당사자들은 ‘황 호랑이’라고 불렀고, 정부 부처를 비롯한 일반 기관에서는 ‘울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언론에 등장할 때에는 ‘장애인 대모’라고 호칭 되었던 분입니다.

질문2 : 장애인의 대모라고 불릴 만큼의 장애인을 위해 많은 일들을 하셨는에 장애인 분야에 일은 처음에 어떻게 하게 되었나요?

답변 : 황연대 선생님이 장애인 대모라고 불리는 계기는 1982년 법관 임용에서 탈락한 장애인을 구제에 앞장서면서 불리워 지게 되었는데요.

황연대 선생님은 1938년 서울에서 태어났고요. 3살 때 소아마비로 다리 한쪽에 장애를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는 여성이라는 것만으로도 차별을 받던 시기였기에 여성, 그리고 다리를 절뚝거리는 장애인이었기에 그야말로 이중적 차별을 받던 시절을 살아 냈던 분입니다.

하지만 기자로 활동하셨던 부친은 집에 손님이 와도 일부러 손님에 장애를 갖고 있는 딸을 소개하고 시중을 들게 해서 주눅들지 않게 키웠다고 합니다.

특히, 일제 강점기 초등학교 입학에 때부터 장애로 인해 낙방했지만 아버지의 도움으로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교육을 받았고 1963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과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에 근무를 하다 1966년에 의사 가운을 벗고 이 땅의 장애인을 위해서 본격적으로 나서게 됩니다.

1960년도는 한국전쟁 후 위생상태가 좋지 못해서 소아마비가 창궐하게 되고 그래서 황연대 선생님처럼 소아마비로 장애를 갖게 된 아이들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해서 황연대 선생님은 1966년에 <소아마비아동특수보육협회>, 현 한국소아마비협회를 설립하게 되는데요. 그때 황연대 선생님의 나이가 28살에 불과했습니다.

질문3 : 좀 아까 이분 별호가 ‘울보’, ‘황 호랑이’었다고 하셨는데 잘 우시나봐요?

답변 : 울보란 별명하고 황호랑이 별명은 완전히 극과 극에 서로 다른 대치점에 있고, 어쩌면 이중적인 면이 있는 것인데요. 그럼, 황연대 선생님이 왜? 울보였는지를 먼저 말씀드리자면요.

황연대 선생님이 본격적으로 장애인 운동을 시작한 1970년대만 하더라도 장애인 인식의 수준은 아침에 장애인은 택시를 탈 수 없는 시대였지요?

택시 운전하신 분들이 장애인을 태우면 하루 종일 재수 없다고 해서 차를 태워주지 않던 시대에 장애인 문제가 생기면 황연대 선생님은 그 문제를 안고 있던 장애인을 붙잡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문제를 만들었던 곳을 일일이 찾아가 또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가 해결되면 감사해서 또 울곤했습니다.

가령, 장애라는 이유로 대학에 입학거부를 당한 학생이 발생하면 그 학생을 붙들고 울었고요. 입학거부를 한 대학을 찾아가 항의하면서 울고, 아버지의 영향으로 신문사 간부들이나 기자들을 많이 알고 있어서 이 잘못된 사연을 이야기하면서 울고요.

그리고 그 문제가 해결되면 해냈다 싶어서 울었다고 합니다.

이런, 울보 황연대는 1970년대부터 1990년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져 왔는데요.

특히나, 공무원 임용 시험, 판,검사 임용에 장애를 이유로 불이익을 받을 경우 황연대 선생님은 울면서도 끝장을 보고 만다해서 울보로 널리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이처럼 눈물로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면서 문제해결을 해서 소아마비로 인해 장관이 되신 분, 국회의원이 되신 분, 대학교수님이 되신분 등등 많은 분들이 계십니다.

그래서 이분들은 황연대 선생님을 어머니라고도 부르곤 해서 그야말로 언론에서 그냥 장애인 대모가 아닌, 실제의 대모라는 평가를 받고 계시기도 합니다.

이 같은 황연대 선생님의 노력이나 열정은 장애인 차별금지법이 없는 가운데에서도 장애인 차별과 맞서 얻어낸 성과여서 더욱 더 크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질문4 : 그럼, 호랑이라는 별명은요?

답변 : 앞서 울보하고 황 호랑이는 이중적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이중적이지만 같은 사안들에 대한 대처였었던 거 였는데요. 그러니까 울보라는 별명이 장애차별과 싸우는 과정이었잖아요. 호랑이라는 별명도 같은 선상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황연대 선생님은 1975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장애인이용시설인 <정립회관>을 개관했는데 정립회관은 장애인 편의시설을 갖춘 현대식 건물이었을 뿐 아니라 장애인 수영장도 있고, 그래서 장애인 수영선수를 키워냈고요. 뿐만 아니라 양궁, 사격 등 일반 학생들도 접하기 어려운 스포츠 수업을 장애 학생들에게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나, 당시에는 장애 학생들은 학교를 다닌다 해도 체육 수업에서 제외됐었거든요. 그래서 고등학교에 진학하거나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체육점수를 받지 못해 상급학교에 진학하는데 불이익이 많았었죠.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립회관에서 특수체육을 실시해서 그 점수를 체육점수에 반영시켜 장애 학생들이 체육 점수로 인해서 차별받지 않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장애인체전이라든가 국가대표 선수들이 정립회관에서 훈련을 받게 되었는데요. 이때 황연대 선생님은 선수들이 훈련할 때나 학생들이 체육활동을 할 때 불같이 호령을 내리고, 심지어는 황선생님 답지 않게 “이 놈XX” 욕설도 하시곤 하셨거든요.

그래서 이때 붙은 별명이 ‘황 호랑이’였습니다.

질문5 : 그래서 장애인 스포츠에도 큰 역할을 담당하셨군요.

답변 : 그렇습니다. 88서울장애인올림픽이 개최된 이후에 장애인체육과 복지가 결합된 재단법인이 설립이 되는데요. 그러니까 현재의 대한장애인체육회와 한국장애인개발원의 전신인 한국장애인복지진흥회가 1988년 서울장애인올림픽이 끝난 다음해인 1989년에 설립이 됩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장애인 체육은 스포츠가 아니라 복지로 접근을 해서 장애인체육의 정부 주관부처가 보건복지부였습니다.

그래서 장애인체육대회를 하면 복지부 담당자들이 업무를 했고, 체육대회에 스포츠 기자들이 취재를 온 것이 아니라 복지부 출입기자들이 취재를 하는 모양세였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체육회 회장님들은 대부분 유명기업의 회장님들이 하셨는데 마찬가지로 장애인복지진흥회도 쌍용의 회장님이나 삼성의 회장님이 맡아왔는데요. 상근을 하지 않는 직이지요.

황연대 선생님이 1998년에 상근부회장님으로 처음 취임하시면서 장애인체육을 그냥, 장애인복지체육이 아니라 장애인 스포츠로 패러다임을 변화시키는데 집중을 하셨기에 우리나라 장애인 스포츠를 정립하시는데 큰 기여를 하신 것으로 평가를 받고 계십니다.

이러한 노력들이 힘을 받아 대한장애인체육회로 독립하면서 복지부에서 관장했던 업무가 문화체육관광부로 이관되어 지금은 장애인 스포츠로 자리를 잡아 장애인체육대회가 열리면 이제는 복지부 출입기자가 아닌 스포츠 담당 기자들이 취재를 하러 옵니다.

질문6 : 장애인전문 체육시설인 이천 훈련원도 황연대 선생님의 공이 컸다면서요?

답변 : 그렇습니다. 이천훈련원은 장애인국가대표 선수 선수촌인데요. 비장애인 국가대표 선수촌하면 태릉선수촌이 연상되지 않습니까? 물론 지금은 진천으로 자리를 옯겼지만요.

그런 것처럼 세계적으로 장애인 전문 체육시설은 중국과 우리나라만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이 훈련원을 황연대 선생님이 계획하고 뛰어다니면서 재원을 마련하고 건립하는데 초석을 놓은 분입니다.

질문7 : 장애인올림픽경기가 끝나면 폐회식에서 ‘황연대 성취상’을 시상하잖아요. 이 성취상이 오늘 전해 주시는 황연대 선생님이 이름을 딴 거였군요?

답변 : 그렇습니다. 황연대 성취상은 장애인올림픽 폐막식때 최우수 선수, MVP에게 주는 상인데요. 경기내내 투철한 도전정신으로 장애에 과감하게 맞선 우수 남녀 선수 1명씩을 선정해서 수여하는 상입니다.

아마도 국제 스포츠대회에서 한국인의 이름을 딴 유일한 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상이 제정된 것은 서울장애인올림픽이 열릴 당시 황연대 선생님이 주부생활이란 월간잡지가 선정한 올해의 여성상을 수상하면서 상금을 받으셨는데 그 상금을 국제장애인올림픽조직위원회에 기증하였고요.

국제장애인올림픽조직위원회는 황연대의 업적을 높이 평가해서 ‘황연대 극복상’을 제정한 것이 지금은 ‘황연대 성취상’으로 이름이 바뀌어 시상해 오고 있습니다.

좀 안타까운 소식은 30여년동안 운영되던 황연대 성취상이 지난 2018평창동계장애인올림픽을 끝으로 종료된다는 점입니다. 선생님 건강도 좋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이유인데, 관계기관에서 기금을 조성해서 이 상을 존속해 나갔으면 하는 바램이 큽니다.

질문8 : 우리나라 최초의 장애인이용시설 정립회관을 만든 분이기도 하군요?

답변 : 황연대 선생님이 이화여자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1965년 세브란스 병원 소아재활원 의사로 근무를 하는데 당시 소아마비란 질병이 창궐해서 소아마비로 장애를 갖게 된 아이들이 많아지니까요. 1966년에 소아마비아동특수보육협회, 현 한국소아마비협회를 만들게 됩니다. 그때 황연대 선생님의 나이가 28살이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나라 최초의 장애인 이용시설인 정립회관을 1975년에 개관하게 됩니다. 정립회관을 개관하는데는 당시 영부인이 육영수 여사의 도움, 서울시의 도움이 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육영수 여사와의 인연은 1965년 어린이 날에 세브란스병원 소아재활원에서 황선생님은 장애어린이들이랑 TV를 보고 있었는데요.

TV에서 어린이날을 맞아 청와대 녹지원에서 뛰어노는 비장애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고 한 장애 어린이가 우리도 청와대에 놀고 싶다란 말을 해서, 황연대 선생님이 육영수 여사에게 장문의 편지를 쓰게 됩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육여사가 친필로 답장을 하면서 청와대로 초청받아 장애어린이들과 함께 청와대 견학을 다녀온 인연으로 정립회관을 건립하는데요. 청와대의 많은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정립회관 개관식에는 1년전 타계한 어머니를 대신해서 큰 딸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 참석하기도 했고요. 이러한 도움으로 정립회관은 당시로써는 생각하기 쉽지 않은 장애인 편의시설을 거의 완벽하게 갖춘 초현대식 건물로 지어졌던 것이었습니다.

해서, 정립회관은 그야말로 장애인 학생들의 메카가 되어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하고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동아리도 만들면서 이른바 장애인대학생들의 운동단체들이 정립회관을 통해서 탄생하게 됩니다.

질문9 : 우리나라 장애인고용법을 제정하고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을 설립에도 큰 역할을 하셨다죠?

답변 : 그렇습니다. 1970년에서 1980년대에 학생들의 입학거부 사태는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1987년 서울시 장애인공무원 특별채용을 시작으로 장애인 공무원이 채용이 전국으로 확대됩니다. 그러면서 황연대 선생님은 장애인 의무고용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당시 노동부에 소아마비 장애인 이채필 사무관, 이채필 사무관은 고용노동부 장관까지 지내셨지요? 이채필 사무관 황연대 선생님, 그리고 현재 장애인 재단 이성규 이사장 몇몇이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과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을 설립하는데 정말 열심을 다 했습니다.

당시 저도 취재기자로 활동하던 시절이라서 함께 현장을 다니면서 법안에 대해서 정리하고 장애계랑 미팅을 갖고 하는 모습을 지켜봐 왔는데요.

그러면서 황연대 선생님은 1993년에 장애인고용공단 이사장이 되셨고, 이성규 장애인재단 이사장도 2011년 장애인고용공단 이사장을 엮임했지요.

이채필 고용부 전 장관이나 이성규 이사장은 사적으로는 황연대 선생님을 어머니라고도 불러서 그야말로 ‘장애인들의 대모’다란 말이 그냥 생겨난 말이 아니란 사실을 증명하기도 합니다.

질문10 : 지금까지 죽 영예로운 일만 있으셨는데 직접 설립하신 정립회관에서는 어떻게 불명예 퇴진을 하게 되셨나요?답변 : 1990년대 민주화 열기와 함께 장애인 시설에도 민주화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장애계에도 장애인 당사자들이 투쟁이 시작됐습니다.

가장 먼저 타켓이 된 것도 우리나라 최초의 장애인복지관이라 할 수 있는 정립회관이 되었던 것인데요. 정립회관 설립이후 15년동안 관장이 바뀌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당연하다 싶었습니다.그리고 정립회관 상위기관이라 할 수 있는 사회복지법인 소아마비협회 상임이사로 황연대 선생님의 남편이 근무를 하고 있었고요.

그러면서 재정에서 횡령이 드러나고 운영에 대한 문제점들이 드러나면서 청년 장애인 당사자들로부터 강력한 퇴진압박 요구받아 퇴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황연대 관장 퇴진은 장애계에서 상당한 충격이었지만 민주화를 부르짖는 젊은 장애청년들에게는 장애해방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투쟁해 왔던 것이기에 우리나라 장애인 역사에 큰 족적이라 할 수 있는 의미가 담겨 있기도 합니다.

질문11 : 황연대 선생님은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가요?

답변 : 황연대 선생님을 가장 최근에 본 것은 지난 '2018 평창동계패럴림픽 폐회식'에서 볼 수 있었는데요.

올해 81세가 된 황연대 선생님은 한동안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3-4년 전부터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계셨던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가끔씩은 뵙기도 했는데 건강이 많이 나쁘지는 않고요. 특히 예전 이야기를 하시면 아주 또렷하게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건강하셔야 하는데 하는 마음이 앞서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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