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 장애인도 후보자로부터 명함을 받을 때는 언제일까? 지하철 1호선 석수역 앞에서 후보자들이 유권자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대기중이다. ⓒ정현석

언제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지방으로 내려가는 고속열차 안에서 코레일이 제작한 광고를 본 적이 있다. 시력이 좋지 않아 열차 안에 있는 작은 모니터만으로는 광고의 내용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인터넷을 검색해 코레일의 광고를 찾아보았다.

광고의 내용은 철도가 연결되는 곳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 말하고 있었다. 산과 강 사이에 철도가 연결되면 환경 보호에도 기여하면서 철도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서로 가깝게 더 자주 만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레일(Rail)이 연결되는 곳마다 새로운 내일이 시작된다는 내용으로 끝을 맺고 있었다.

“투표하러 가실 수 있으시죠? 기호 0번 아무개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10년 전, 법적으로 선거권을 얻었지만 선거에는 관심이 없고 휴일에만 마음이 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심야 시간대에 지하철 한 대 정도 기다릴 시간이면 투표를 할 수 있었긴 했으나 황금 같은 휴일에 굳이 옷을 입고나가 움직이기 싫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국회의원 선거 운동이 시작되고, 후보자들이 아침저녁으로 유권자들에게 인사를 하기 시작할 때였다. 그날도 아침에 지각을 하기 않기 위해 정신없이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던 내게 누군가 나지막한 인사와 함께 자신의 이름이 적힌 명함을 나눠주었다. 별 생각 없이 명함을 집어 주머니에 넣으려는 순간 이런 말이 들려왔다.

“아니 저 사람은 몸이 불편해서 투표소도 못 갈 텐데 그걸 왜 줘요?”

순간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주변을 살펴보았으나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횡단보도에는 물론, 바로 건너편에 있는 정류장에서도 나를 제외하고 몸이 불편한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조금 전 그 말은 나를 두고,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내 장애를 선거권과 연관 지어 말한 것이 분명했다. 곧 파란색으로 바뀐 신호등만 아니라면 “지금 방금 한 그 말이 나를 두고 한 말이냐”고 따졌을 터였다. 그런데 횡단보도를 건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후보자가 자신의 명함과 함께 악수를 건네며 인사를 건네며 조금 전과 비슷한 말을 했다.

“투표하러 가실 수 있으시죠? 기호 0번 아무개입니다. 횡단보도를 건너실 때 보니 투표하러 가기가 많이 힘드실 것 같은데, 그래도 잘 부탁드립니다.”

투표장 내 편의시설 없이 장애인유권자 세력화는 불가능

두 후보의 말은 전혀 다른 듯 보였지만 결과적으로는 “당신이 몸이 불편한데 투표장에 가기가 어렵지 않겠느냐”는 것이 핵심이었다. 다만 같은 상황에서 다른 후보는 “투표 불가능” 으로 확정을 지었으며, 또 다른 이는 “힘들지만 투표하러 가서 뽑아 달라”고 말했던 점이 달랐을 뿐이다.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가 있을 때마다 각 정당의 후보들은 교회 사찰, 성당 등을 찾아 인사를 하며 자신들을 뽑아 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선거철이 되면 쏟아지는 각종 뉴스들 속에서 단 한 번도 “00후보는 장애인들을 찾아 지지를 호소했습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다만 장애인을 찾는 후보들은 장애인들에게 지지를 요청한 것이 아니라 시설이나 단체를 방문해 “위로”하고 장애인들을 “격려”했다는 소식이 전부다.

우리가 선거를 앞두고 다시 한 번 지역 내 장애인 편의시설에 대해 개선과 보완을 요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무리 장애인 인구가 전 국민의 10%에 달한다 해도, 그들이 밖으로 나와 실제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편의시설로 연결되는 당당한 세상을 꿈꾼다

오늘 역시, 아침 출근길, 지하철역을 나와 버스로 갈아타려는 내 앞에 누군가가 명함을 내밀었다. 그러나 내 눈 앞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후보자의 이름도, 소속 정당도 아니었고, 조금 전까지 헉헉대며 올라온 난간 없는 계단이었다. 만약 투표장에 이 같은 계단이 있다면 나는 선거권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선거를 앞두고 각 당마다 장애인과 관련한 공약이 한창이다. 그러나 다른 공약은 말고 투표소와 지하철 역 내에 경사로 설치를 의무화한다는 공약을 내건 후보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장애인 유권자가 휠체어를 타고 편안하게 투표하는 그날이 바로 “장애인”이 아닌 “유권자” 로 대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레일로 이어지는 행복한 세상"보다 "편의시설로 이어지는 당당한 세상"을 꿈꾼다.

길 옆에 엘리베이터가 있다. 투표장에 이런 시설이 많아질수록 장애인들은 유권자로써 제대로 대접받을 것이다. ⓒ정현석

*이 글은 현재 경기도 광명시에서 살고 있는 독자인 정현석님이 보내왔습니다. 에이블뉴스는 언제나 독자 여러분들의 기고를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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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석 칼럼니스트 집에서만 살다가 43년 만에 독립된 공간을 얻었다. 새콤달콤한 이야기보다 자취방을 얻기 위한 과정에서 겪었던 갈등들과 그것들이 해결되는 과정이 주로 담으려 한다. 따지고 보면 자취를 결심하기 전까지 나는 두려웠고, 가족들은 걱정이었으며, 독립 후에도 그러한 걱정들은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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