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복지재단이 최근 ‘제8회 일상속의 장애인-스토리텔링 공모전’을 진행했다.

스토리텔링 공모전 ‘일상 속의 장애인’은 장애인과 관련된 일상 속 이야기들을 통해 장애인식개선을 도모하고자 2015년부터 진행되고 있다.

올해 공모전 결과 박관찬씨의 ‘청년은 오늘도 첼로를 연주합니다’가 보건복지부 장관상의 영예를 안았으며, 총 19편이 수상했다.

에이블뉴스는 총 19회에 걸쳐 공모전 수상작을 연재한다. 열세번째는 장려상 수상작인 박미경 씨의 ‘우리들의 연’이다.

우리들의 연

박미경

아버지는 오늘도 가요 채널을 시청하고 계실 거다. TV 속의 저 화려한 세상에 아버지는 겁 없이 도전하셨다. 곰보 소리를 수없이 들으면서 자랐을 유복자인 아버지의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면 아버지의 한과 설움도 결코 작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기 때 천연두를 앓은 아버지는 얼굴이 얽으셨다. 남들은 아버지를 무섭게 보지만, 우리 일곱 자매들에겐 그렇지 않다. 제법 잘생긴 축에 드는 남자다운 얼굴을 가진 아버지니까 말이다.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아버지도 나처럼 마음속에 응어리진 한을 저리 노래로 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아마, 그럴 것이라 믿는다. 늦은 나이에도 용기 있게 도전해서 가수와 작사가의 꿈을 이룬 아버지를 보며 나도 무언가 해낼 수 있다는 용기를 배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아버지가 요즘 들어 우리를 가끔 헷갈려 하신다. 나이도 드셨고 자식이 일곱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여겼다. 80세를 넘기고 부터는 예전 같지 않게 행동과 말투가 다소 느려지긴 했지만 본인의 생각을 조리 있게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치매를 앓게 될 줄은 몰랐다. 아버지는 우리가 찾아가면 간혹 일곱 명의 자식들이 헷갈릴 때가 있다며 농담처럼 가볍게 말하곤 했다. 아무렴 저리 정정하시고 활동을 많이 하는 분에게 치매가 오리라곤 상상도 안 해봤다. 여전히 나는, 아버지는 우리가 어릴 때처럼 그 자리에서 가장 든든한 사람으로 버티고 있어야 한다고 착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아버지니까 그래야 한다고 우기며 지냈는지도 모르겠다.

급성 치매 초기! 아버지의 병명이라고 의사가 진단했다. 약을 꾸준히 복용하면 진행을 늦출 순 있지만 차츰 파괴되는 뇌가 정상으로 돌아올 순 없다고 했다. 막내들은 눈물을 흘리며 ‘어떡해, 어떡해’를 외쳤고 자매들인 우리는 눈물을 글썽이며 숙연히 엄마의 말을 경청했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유난히 가요를 좋아하던 아버지셨다. 수십 년 전 당시에 어려운 집안 살림에도 가격이 꽤 나가는 전축을 집에 선뜻 들인 것도 아버지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듣고 자라서인지 가족들이 음악적인 감각이 다들 있다. 악기 하나 정도는 다루는 집안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열외였다. 중증의 청각장애인이 된 나니까 열외가 당연한 거라 여겼다. 청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이후부터 내가 음악이나 악기를 다루게 되리란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으며 오랜 시간을 보냈다. 나는 그렇게 음악을 멀리하며 살았다.

아버지는 늦게라도 자신의 꿈을 이루고 싶다며 78세에 가수에 데뷔하신 이후 몇 년 동안 작사가로도 활동하셨다. 아버지만의 공간을 만들어 음향시설과 악기들을 놓고 그곳에서 노래를 하고 악기도 다루셨다. 요즘도 가끔 드럼을 연주하고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시는 아버지다. 우리들은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치매 소식에 놀라고 마음 아팠다. 아버지가 언젠가 엄마와 우리들을 아예 못 알아볼까 봐 두렵다. 아버지는 다정다감한 분은 아니지만 속정이 깊은 분이시다. 아직은 치매라는 게 크게 티 나지 않는 아버지를 대하며 나는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아버지의 치매 소식을 들은 후 멍한 심정으로 며칠을 보냈다. 그러다 갑자기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버지가 나를 알아볼 때 멋지게 드럼 치는 내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맏딸인데다 남편 복 없이 이혼을 하고 어린 딸을 키우며 혼자 살던 나는 부모님에게 가장 아픈 손가락일 것이다. 중증의 청각장애가 있는 나를 부모님은 특히 더 애틋해 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을 가까이하는 나를 보는 아버지의 기쁨을 온전히 느끼고 싶은 욕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열정이 있다면 못할 게 무언가 싶었다. 아버지가 나를 온전히 알아보실 때 무언가 선물을 하고 싶었다. 이제껏 받기만 했지 부모님에게 무얼 줄 줄 모르던 나다. 나는 곧 다가올 아버지의 생신날을 기다린다. 마침 내가 드럼을 배운 지 1년이 되는 시기와 아버지의 생신이 비슷하다. 부모님 댁에 가족들이 전부 모이는 아버지 생신날, 내가 드럼을 치는 모습을 보이기로 마음먹었다.

‘연’으로 하기로 했다. 아니, 연이 되기로 했다. 가슴에 콕 박힌 아픔을 높이 나는 연처럼 날려버리고 싶었다.

나는 후천적으로 청각장애를 가진 이후부터 늘 그런 생각을 했다. 하늘 높이 날고 지치고 서러운 마음도 훨훨 나는 그런 연처럼 날고 싶다는 생각을. 문득, 1년 전에 든 생각은 이랬다. 치료할 수 없는 날개를 가진 채 살아온 지난 30년 세월의 한을 연이라는 노래를 통해 드럼으로 발산하고 싶었다. 청각장애가 있어도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연’은 1주년 기념작 치곤 제법 근사한 노래,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노래라는 생각도 들었다. 적당히 빠른 박자에 멋진 필인이 들어간 7080 음악이니 귀에 이상이 오기 전인 10대 때 내게 익숙한 노래이기도 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다. 1주년이 되면 꼭 ‘연’을 칠 수 있는 내가 되겠다고 결심했었다.

나에게 드럼은, 드럼을 알기 이전까지와의 생활과 많이 다른 일상을 선물했다. 탐험하고 모험하고 도전하는 지난 1년을 보냈다. 아버지가 곰보라는 얼굴과 나이 78세라는 장애물을 걷어내며 가수가 되었듯이 나도 내 청각장애를 이겨내고 싶었다. 가끔은 이걸 할 수 있을까,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음악 하는 동료들의 격려와 가족의 응원을 마주하며 고비를 잘 넘겼다. 가끔 지치고 힘들어도 꾸준히 집중했다. 심벌 소리를 듣지 못하거나 가사가 안 들려 박자를 놓치지 않으려고 남들보다 수배는 더 감각에 집중했다. 묘하게도 나의 장애가 내 근성을 더 깨웠던 것도 같다. 남들이 하듯 나도 악기를 다루지 못하리란 법이 어딨냐는 오기가 생겼다. 열정이 있었기에 드러머의 희망을 지우지 않았다.

처음 드럼을 배우려고 찾아갔던 동호회에서의 일들이 떠오른다. 한 달 회비 5만 원, 언제든 나와서 드럼 연습을 할 수 있으며 매주 한 번 단체 강습을 공짜로 해준다고 했다. 같은 또래들이고 가족적인 분위기라 편하게 회원들과 어울리며 배울 수 있다고 그곳 사장이 자랑하듯 설명했다. 나는 우선 사장에게 내가 청각장애가 있다는 것부터 알렸다. 그것도 중증의 청각장애라는 것을. 사장 눈이 잠시 동그래졌다가 원상태로 돌아오는 걸 보았다. 익숙한 나는 모르는 척했다.

“대화도 잘하는데 표가 잘 안 나요.”

사장이 미심쩍다는 듯 말했다. 나는 사장의 입 모양과 표정을 통해 그가 전하는 메시지를 이해했다. 들어서서 의자에 앉자마자 날이 덥다며 사장이 내어준 시원한 커피를 마시며 한 대화였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장은 예리한 눈매에 비해 동근 얼굴이었다. 겉보기보다 듣는 일이 힘들다고 내가 부언했다.

“대화라는 영역이 저음이 대부분이거든요. 80퍼센트가 저음 영역이기 때문에 그나마 제가 대화를 이해할 순 있어요. 소리가 들려도 정확한 발음을 다 아는 건 아니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해요. 정면으로 얼굴을 봐야한다는 조건이지만요. 하지만 그 외에는 장소에 따라 못 알아듣는 소리가 많아요. 소리를 못 듣는 게 아닌 소리를 못 알아듣는다는 거지만요. 모르는 사람들에게 오해를 자주 받지만 이젠 익숙해요. 보청기를 해서 그나마 이렇게라도 들을 수 있어 감사하죠. 여러 번 생각해 봤어요. 과연 내가 악기 하나를 제대로 다룰 수 있을까? 귀가 이런 내게 제일 만만한 악기는 무얼까? 요리조리 따져 봐도 역시 드럼밖에 없더라고요. 드럼은 베이스 킥을 중심으로 연주하니까 제가 다룰 수 있다고 여겼어요.”

사장이 신중히 듣다가 입을 굳게 다물더니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어릴 때 가수가 되는 게 꿈이었거든요. 학창 시절에 기타를 배운 적도 있긴 해요. 어쨌든 나름대로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그래요, 열정이 있으면 못 할 일이 어디 있어요. 해봐요. 내일은 드럼 배우려는 회원들이 모두 모여 강습 받는 날이니까 내일 시간 맞춰서 나오세요.”

동글고 선한 인상을 한 사장의 격려에 힘이 났다. 도전을 두려워해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안다. 나는 동호회에 소속되며 각종 악기를 다루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세계로 발 디뎠다.

열여섯 명 회원 중에 나처럼 장애가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음악을 하는데 청각장애가 있다면 보통 사람들은 어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동호회 사람들은 나의 청각장애를 알고 이해하며 같이 기초를 배우고 드럼을 배웠다. 나는 동호회에서 드럼의 기본을 배운 뒤 혼자 독학을 하다가 한계를 느껴 3달에 6만 원 하는 타 드럼 강습을 받았고 밴드 활동도 했다. 일주일에 한 곳씩 곡을 받았다. 혼자 음악실에 다니며 연습하며 실력을 키웠다. 이제 보름 후면 드럼에 입문한지 1년이 되는 날이다. 그동안 개인 드럼 공연과 밴드에서 드럼을 맡아 공연도 해봤다. 코로나 때문에 무관중 공연이었지만 무대에 올라 맘껏 드럼을 친 순간들은 내게 희망이라는 빛을 준 사건이다.

나는 오늘도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치매로 인해 아버지의 음악에 대한 성장은 차차 멈출 테지만 그 멈춤을 내가 대신해서 드럼이라는 악기로 성장시키며 키우고 싶다. 자신이 가진 장애나 힘든 환경을 핑계 대며 할 수 없다는 편견을 깨면 세상은 넓고,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많음을 알게 된다. 앞으로 남은 시간을 청각장애인이지만 멋진 드러머로 알려지고 싶다.

나는 오늘도 ‘연’ 연습을 한다. 1주년 기념곡을 무사히 마치면 다시 또 2, 4, 9,.. 10주년의 시간이 올 거라 믿는다. 10주년, 20주년이 올 때까지도 부모님이 살아계시면 좋겠다는 욕심을 내본다. 아버지와 엄마가 비록 우리들을 알아보지 못한다 해도 살아계시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고 감사할 것 같기 때문이다.

부모님과 우리들의 ‘연’이 저 멀리 하늘에서 난다. 꼬리를 흔들며 힘차게 난다. 어떤 환경에 있는 누구든 꿈과 희망을 놓지 않으며 저 ‘연’처럼 하늘을 훨훨 날 수 있는 사람들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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